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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Apr 21. 2021

당신 삶의 주인이 되세요

영화’소울’ 리뷰 |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율, 자립, 자존, 자유... 2020년을 지나 2021년으로 넘어오면서 내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 세상에 왜 왔는지, 우주에서 내가 맡은, 미미하지만 실존적인 역할은 무엇인지. 작은 머리로 생각하느라 꼬박 일 년이 갔다. 그리고 영화 '소울'을 보았다.


 '()' 시작하는 수많은 개념들을 생각하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엔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하고서 해내려고 노력해왔던 것들의 과정과 성과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노력하며, 이겨내며  번도 의심해본  없이 해왔던 일들에 점차 소진되어 가는 나를 느꼈다. 부모님으로부터, 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았지만, 오히려 나를 위한 것이 아닐  있다는, 삶의 음과 영을 함께   아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삶의 밸런스를 잃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옳다고 믿었던 일도, 열심히 하고 싶은 일도  되지 않았다. 아니, 열심히 자체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답답한 마음에 열과 성을 다하긴 했지만, 답답해하느라, 속상해하느라, 잘하고 있는 건지, 잘할  있는 건지 의심하느라 할 수 없었다. 한참 수능을 공부할 , 영어를 공부하면서도 수학 점수가 떨어질까 불안하고, 수학을 하면서도 국어를  보고 있다는 것에 불안해하는 격이랄까. 그러면서도 수능을 대체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곤 하는 것이다. 수능을 본지 무려 18년이 났는데도, 삶에서 공부하는 과목들조차 나는 역시  과목  과목을 전전하며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진정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모르는 채로.  삶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있어야 되나 싶기도 하고, 뭔가 원하는 것이 있긴 있는  같은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삶의 길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는  알아차린 지점에 ( 전에는 내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화 '소울' 봤다.


  가드너 역시 삶의 수많은 요구들 사이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이끄는 재즈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비록 비정규직 음악교사로, 홀어머니 아래서 독립해 음악에 심취해 사는 싱글남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지는 않는, 어찌 보면 평범하고 오히려 조금은 아쉬운 삶을 사는 그이지만, 그의 삶에서 다른 사람과 유일하게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재즈"였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찾아가게  재즈바에서 생동감 넘치는 리듬과 사운드에 매료된 뒤부터 조는 재즈의 길에 접어들었다. 작은 집에 이렇다  세간이 그다지 없는 보금자리에 피아노는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재즈로 성공한 아니었다. 그의 재즈 연주가 누군가에게 인정받아  적이 없었는데도 그는 그저 음악이라면 눈빛을 빛내는 모습을 보였다. 음악 교사와 재즈 연주자.   음악에 관련이 있는 직업인 데다  안정적이고 탄탄한 직업이라면 역시 교사가 분명했는데,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홀어머니가 정규직 교사가 되기를 권했는데도 그의 꿈의 방향은 재즈 연주자가 되는 데에 무게 중심이 실렸다. 극적으로 바라 마지않던 도로테아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발탁되는 기회를 얻고 나서, 그는 너무 기뻐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꿈에 그리던 밴드 연주자로  공연을 하는  맨홀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만다.


이제 막 바라 마지않던 밴드의 연주자가 되어 첫 고연을 하려는데, 그의 생은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당연히 조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삶의 궤적 속에서 어마나 쭈구리로 살아왔든, 잊고 싶은 기억이 백만 스물한 개 순간이든, 죽음의 순간에 느꼈던 아쉬움이 그 삶에 미련을 두게 한다. 사람은 이렇게나 찰나의 존재다. “죽음” 때문에 그가 놓친 기회는 일생을 담보할 그 무엇도 아닌, 한 번의 연주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나 조는 “더 살고 싶다” 고 말하기보다 “오늘 저녁 재즈 클럽에 가야 해”를 말하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로서의 삶이 그의 삶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그의 삶 속에는 어머니도 있고, 가르치는 학생도 있고, 잠시 도움을 받은 정서안정 고양이도 있었고, 짝사랑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 그의 삶을 잇고 싶게 한 그 무언가는 오직 음악이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죽음으로부터 살아돌아와 첫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낸 조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조: 이제 내일은...

도로테아: 내일도 와서 공연을 하지.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는 공연을 하는 거야.

조: 저는 공연을 하면 뭔가 다른 느낌일 줄 알았어요.  


도로테아: 한 청년이 있었어. 늘 말했지. “전 바다로 가고 싶어요.” 옆의 그의 멘토가 말했다. “여기가 바다야.” “아니에요. 이건 물이잖아요.” 


그렇다. 우리는 ‘바다’를 물이라 믿으며 어딘지 모를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향해 현재를 소비하며 산다. 어딘지 모를 그 이상에 대한 아쉬움이 현재를 희생하게 하기도 하고, 생을 선택하고 이어가게 하기도 한다. 이미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못 가졌다며 더 바라기도 하고,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일생의 꿈으로 정하고 허덕이기도 한다.


삶의 목적은 그런 의미에서 굳이 필요가 없다. 삶의 목적은 삶 그 자체였다는 깨달음. 선물처럼 다시 얻은 삶을 통해 조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제리의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현재를 살 겁니다.”


주인공인 조와 no.22가 삶을 위해 모아야 했던 “불꽃” 은 흔히 말하는 삶의 의미도, 삶의 목적도 아니었다. 그저 “그를 그 답게” 만드는 “행복의 씨앗”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결국 유한한 삶을 스쳐가는 우리로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움켜쥐고, 조금 더 가지기 위해 애쓰는, 소진될 열정이 아니다. 그저 사는 순간순간, “자기다움”을 일관되게 지키며 사는 것, 삶을 소중하게 대하고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매 순간의 기쁨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담는 것.


영화를 보고서, Great before에서 Great beyond로 가는 여정 사이, 나는 어떤 자기다움의 재료를 받아 “Great being” 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Great Being을 위해서는 나를 넘어선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존재를 기뻐하고 누리며 있는 그대로 할 일을 하는 것뿐.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관계가 쌓이고 자기다움의 흔적이 쌓여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soul 이 이 세상에 왔다 간다.


https://youtu.be/AVJVj5SwK20



정밀아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또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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