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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Apr 28. 2021

이상과 현실 사이, 처절하게 슬프고 기묘하게 유쾌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리뷰

 웃기도록 순수한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릴 적 읽었던 돈키호테는 눈치 없고 순수하고, ‘기사’ 라면 사족을 못 쓰다 못해 자신이 만든 꿈속 기사의 세계관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세계관과 그를 함께 만나느라, 너무 다른 세계관 속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웃고, 현실 속에서 혼자 이상을 좇는 순수함이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세상을 조금 살다 만난 “맨 오브 라만차”는 동떨어진 세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재치 넘치는 대사와 발랄한 사운드 속에서 비춰지는 처절한 현실, 등장인물의 현실적인 모습들에 진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그야말로 풍자가 지닌 힘이다.


“기사” 가 세상을 살던 300년 전의 시대에도 이상과 현실 속 갭은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이 작품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잊히고 있는, 사실은 지켜져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소위 “기사 이야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늙은 귀족”을 내세우며 이야기한다.


#살고 싶은 삶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충분히 자신의 저택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알로소 키 차 노는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삶”의 페르소나를 “돈 키호테”로 명명하고 자신이 사는 세계마저 세계관에 맞춰 바꿔버린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그에겐 그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으로 이뤄지는 간단한 일이다. 관점을 바꾸고 그저 믿어버리면, 그가 사는 세상은 생판 다른 세상이 된다. 살고자 하는 삶을 사는 것도, 그 삶을 담고 있는 세상을 바꾸는 것도 평생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는 데, 사실은 마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이 강하면 동조자가 생긴다. 극 중에서 돈키호테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기꺼이 그를 즐겁게 따르기로 결정한 산초. 산초는 돈키호테의 세계에 동참하나, 그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다만 산초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이유는, 무서운 아내와 부양의 책임이 지워지는 현실 세계보다는, 돈키호테의 세계가 더 즐겁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세계 속에서 살 것인가” 는 역시 미치든 미치지 않든 개인의 선택인 것이다. 굳이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거창하게 결정하지 않더라도 돈키호테의 어처구니없는 요구 - 예를 들면 기사 책봉식- 등에 응하는 주막집 주인도 있다. 주막집 주인 역시 돈키호케의 세계관에 동참하거나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의 행동 정도는 돈키호테에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응한다. 그에게는 아마도 생계를 위한 ‘고객님의 요구’ 였을지 모른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동조해주건, 결국 돈키호테의 세계관은 완성되어간다. 한 사람의 의지가 이렇게나 강하다.


#기사도, 잊혀가는 가치에 대한 환기


나는 기사도의 면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기사도가 “사람됨” 혹은 “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를 통해 세르반테스가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에 대한 힌트는 작품을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낯선 성에 방문하더라도 기꺼이 환대받을 것이라는 믿음, 존재 자체의 가치를 알아주고, 편견이나 포장 없이, 존재 자체로 빛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마음, 원수라 하더라도 돌보고 용서하며 긍휼히 대하는 인간애. 주어진 시간 동안 미약할지언정 최선을 다해해야만 한다고 믿는 무언가에 정성을 쏟는 진심. “승패와 관계없이,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가야 할 길을 간다” 는 대사에서는 미련하리만치 매 순간 자신의 방향을 지키고 꿋꿋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눈물겹다.


#책임질 수 없어도, 사람을 변하게 하는 영향력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막의 창녀 “알돈자 돈키호테는 “둘시네아, 영혼의 레이디라고 부르며 숙녀 대접을 한다. 알돈자는 사상아로 태어나  잔일을 도우며 추파를 보내는 사내들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다. 창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분노하지만, 분노를 어찌할 수도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알돈자에게 돈키호테가 전하는 환대는 누군가에게 환대를 제대로 받아본  없는 그녀에게 분노가 되기도, 절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창녀인데, 나를 레이디라 불러서 왜 더 절망하게 해. 왜 헛된 희망을 갖게 해.”


사실 그녀가 절망한 이유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할지라도 세상에게 창녀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녀를 창녀로 대한다고, 혹은 그녀를 레이디로 대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그녀의 존재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돈키호테는 그녀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은 누구도 타인을 책임질 수 없다. 빼빼 말라 자신의 갑옷 무게마저 감당하지 못하면서 불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분연히 일어나는 돈키호테를 보며, 불의를 응징하고서 응징당한 불의를 돌봐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서, ‘둘시네아’가 된 알돈자는 자신이 불의의 세력을 돌보러 가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돈키호테를 지키려 한 것이었을 테고, 창녀로 대해질 것이 뻔한데도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숭고한 태도를 행동에 담아보려 한 것일 터다. 작중에서는 청중의 상상에 맡겨지는 연출이었지만, 어설프게 응징당하고 분노한 노새 몰이꾼 무리가 알돈자에게 어떻게 분풀이를 했을까 상상하면 끔찍하고 잔인하다. 알돈자는 알고서도,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으로’ 가장 끔찍한 판에 들어가 그들을 돌보는 길을 택했다. 세상이 자신을 창녀로 대할지라도, 그녀는 성녀로 스스로를 대한 것이다. 아마도 끔찍했겠지만, 세상이 창녀로 대한다고 분노에 가득 차 창녀의 삶을 짊어지고 하루를 버틸 것인가, 세상이 보는 시선에 관계없이 스스로 되고자 하는 삶을 택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알돈자, 아니 둘시네아의 모습은 찬란히 빛났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니지만, 나는 내 편이다.


세상살이는 만만치가 않다. 타인이 보여주는 숱한 관점과 다양한 삶의 방식, 성공의 기준과 안락의 기준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삶을 스쳐 지나가며 나를 흔든다. 돈키호테와 알돈자, 산초를 보며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밀고 나가는 삶의 가치를 본다. 이상주의는 늘 현실주의자들에게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이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불이랄까.


하루하루의 삶 살이가 고달플 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삶 살이의 중심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숭고하고 대단한 일이다. 설사 누군가에게 이해가 되지 않을 행동으로 보일지라도, 그 중심에 추구하는 가치가 자리할 수 있으면 내 삶에 일관성을 더할 수 있다. 꾸준히 이어지는 일관성은 다른 이의 삶에도 감동을 전한다. 이러한 감동은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는 힘이 되어 모인다. 이상이 조금씩 현실이 되는, 미약하지만 단단한 무게추가 된다.


무언가 하나쯤 가슴에 품고 지키겠다고 결심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작지만 미약한 ‘기사’가 되어보자고 생각한다. 내가 지키고픈 신념이 내 행동을 다듬고, 행동이 일관성 있게 드러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이상이 현실로 다가올 날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아니, 굳이 이상까지 찾지 않더라도 매 순간, 되고자 하는 나로 나를 대할 수 있다는 것만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기보단, 스스로 되고 싶은 ‘무엇’이 되기로.


“맨 오브 라만차” 는 내 안에 작은 보석함을 선사하고, 그 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를 물어보는 작품이었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 기사인 걸까. 물끄러미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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