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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May 04. 2021

사랑,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언제쯤이면 조금 감이라도 오려나.

"언니랑 나는 진짜 사랑꾼이잖아." 


서로를 "사랑꾼"이라고 칭하는 지인이 있다. 팜므파탈이어서가 아니다. 둘 다, 사랑 없이는 살기가 참 힘들지 않겠나라고 생각의 결을 맞추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사랑 없이는 살기 어렵다 말하면서 그놈의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이틴 로맨스 영화의 대표주자.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20대의 사랑은 감정이 널을 뛰는 사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느 시점에라도 사랑은 감정을 들뜨게 한다. 그러나 20대 때의 사랑을 떠올려보면 아주 불같은 사랑을 했다. 나는 수능을 보고서야 본격적인 연애를 한 것 같은데, 몇 번의 어설픈 풋사랑인지 짝사랑인지, 괜히 부모님께 혼날까 무서워서 도망을 다니기도 하고.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벌렁벌렁거리기도 했던 알 수 없는 가슴앓이의 시기를 지나고서, 수능을 본 후 대학에 들어가기 전 조금은 여유가 있을 시절에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순수했던 건지, 불안했던 건지, 당시에는 40자 메시지 제한이 걸려있는 PCS를 쓰던 시절이었는데, 제한적인 표현 속에도 이모티콘을 어떻게든 욱여넣고, 그 와중에 텍스트로 오가는 상대의 감정을 읽고선, 조금이라도 상대가 불편하다 싶으면 그렇게나 열일을 제쳐놓고 마음의 우선순위를 그에게 올렸다. 이게 사랑인지, 감정을 태운 건지, 알듯 모를 듯, 뭔가 신기하고 뭔가 들떠서는 연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싶으면 그들은 군대에 갔다.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도 하고, 통화를 하며 밤을 새우고... 뭘 하든 빠르게 끓어올랐던 시기다. 떠올려보면, 뭘 하면서 보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저 뭔가 엄청 빠르게 빠르게 돌아간 것 같은 기억만 난다. 뭐, 젊었으니까. 


30대의 사랑은 딱 감당할 만큼까지만 아름다웠다.


 30대의 사랑은 다르려나 싶었다. 30대의 사랑은 감정을 넘어 삶과 연결고리를 생각하는 사랑이어야 했다. 격정적이었던,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던, 행여나 떨어지면 식음을 전폐하고 친구에게 하염없이 전화를 걸어 통화하며 엉엉 울어야 했던 20대의 사랑은 30대가 되어 돌아보니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지나보내고 나면 그렇게 아픈 것만은 아니라는 걸, 감정 때문에 많은 것들을 보지 못했거나 놓칠 수도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이벤트였다. 20대 때는 격렬한 감정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삶과 성장의 연결고리를 알 수 없었다. 성장의 속도, 대화하는 방식,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 등 사람 대 사람으로 맞아야만 하는 케미뿐 아니라 경제적 여건, 사회적 여건과 버무려졌다. 해내야 할 것도, 맞춰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30대의 사랑은 뜨거울 수가 없었다. 현실의 무게가 무겁고, 실체 없는 의무가, 삶의 주체로서 핸들을 힘 있게 잡고 가는 길목마다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주변 환경의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배우자를 풍요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묘하게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여기에 답을 찾느라 진짜 사랑은 빛이 바랬다.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랑의 답이 결혼은 아니지만, 결혼에 필요한 조건들을 갖춰야 사랑의 후보가 될 수 있는, 이상하고 묘한 사랑이 세계관 속으로 들어왔다.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와중에 사랑의 조건을 하나하나 맞춰가다 보면 이번 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이상적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곤 했다. 사람을 조건부로 보는 사랑이 이상하지 않은, 그래서 '결혼정보회사'라는 묘한 사업영역에서 돈을 버는 듀*나 가* 같은 회사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 30대의 사랑이었다. 


 

똑같은 삶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기. 사랑도 똑같았으면 좋겠다. 


 아직 40대가 되진 못했지만, 생존의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난 시기에 하는 사랑은 다시 본질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서로의 사는 방식과 멋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랑. "넌 내 거" 라며 소유하는 사랑이 아닌 (이미 우리는 누군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안다) 곁에 있어서 빛나는, 서로가 서로의 안정감이 되어주고, 또 서로를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게 세상을 향해 발 디딜 수 있는 사랑. 이전에 나는 사랑이 '기분 좋은 상태'를 줄곧 주고받는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함께 하는 기분 좋은 상태만을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서로의 존재가 귀하다. 누군가의 기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은 끝없이 맞춰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결국 사랑을 한다며 서로를 바꾸려 하고 소진시키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부담일지도 모른다. 내 곁에 있을 때만 존재로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사랑받아 마땅하고, 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 


 사실은 잔뜩 써놨지만 사랑이 뭔지 잘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뭔지도 모르는데 사랑은 어찌나 가슴에 다가와 흠뻑 담기는지, 적지 않은 나이에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며 했던 사람 앓이 덕분에 존중을 배우고 인정을 배운다. 있는 그대로 기뻐하고, 있는 그대로 고마운 걸 사랑이라 쓰고 싶지만. 한편에는 예쁨 받고 싶고, 달달한 뭔가를 바라고 싶다(아. 꺼지지 않는 20대 풋사랑의 욕망이여). 


오늘 지인에게 


"예쁘고 싶긴 한데, 예쁨 받고 싶지는 않아." 


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존재론적으로' 나는 예쁘지만, 누군가에게 수동적으로 예쁨 받고 싶지는 않다는, 강한 자의식의 표현 이리라.  내가 생각해도 지랄 맞고 까탈스럽다. 

 

어느 순간부터는 꼭 로맨스나 에로스의 방식으로 일컬어지는 사랑보다 더 큰, 한 사람이 아니어도 나와 가깝고 만나면 기쁜, 남녀노소의 범주를 막론하고 연결되는 연이 사랑스럽다. 예쁨 받는 것보다 사랑받는 느낌이 담뿍 느껴지는 관계에 마음이 가고 안심이 된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그런가. 막걸리에 파전이나 구울 것을, 술을 마시고 쓰는 사랑글은 왠지 무책임한 것 같아 애써 참고서 서재방에서 커피를 한잔 내려놓고 사랑타령을 하고 있다.

 사랑꾼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나지만, 앞으로 내가 배울 사랑은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의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갈구하거나 답을 정해놓고 혹시 상대가 내가 바라는 답을 주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상대가 떠나는 것이 두려워 하염없이 맞추거나, 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방어적인 사랑 말고, 건강하고 따듯한 삶과 관계를 누리며 홀로 또 함께 어깨를 맞춰 걷는, 힘든 삶의 여정에서 상대를 업고 걷거나 업어달라고 조르기보다 힘든데도 한 걸음 한걸음 걸음을 내딛는 상대가 귀하다는 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따뜻한 눈으로 응원해줄 수 있는. 응원을 받아서 정성껏 살고, 응원을 주는 존재이기에 부끄럼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스피노자가 쓴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렵고도 드물다."였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드문, 성스럽고 고귀한 일 인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조차,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지는걸. 우리는 유한하기에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싶고, 흘러가는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작은 것에 집착한다. 이때, 집착을 살짝 내려놓고(집착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마저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보다 가볍지만 깊이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결국은 또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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