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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un 19. 2021

천천히. 더 천천히 킥을 차세요.

자유형 초보자의 멘붕 극복기

수영을 배운 지 한 달 만에 킥보드도, 거북이 등도 떼고 자유형을 해 보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킥보드를 잡고 롤링하며 자유형 호흡을 할 때는 킥보드가 내게 얼마나 커다란 의지가 되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맨 손을 앞으로 뻗고 수면과 수평이 되게 섰다. 과연 나는 리듬감을 느끼며 자유형을 소화할 수 있을까. 


 두근거리던 첫 도전은 보기 좋게 실패. 처음 호흡은 잘 됐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고, 호흡을 할 때마다 몸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발차기가 조급해지고, 발차기가 조급해진 만큼 숨이 가빠지니까 호흡할 여유가 없고, 점점 내 자유형은 "자유롭게 살려주세요"를 하는 꼴이 됐다. 가까스로 25미터를 버둥거리며 갔다가, 다시 선생님이 있는 레인 초입으로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너 같은 애들 많이 봤다'는 표정으로 "춤췄던 거야?" 하고 물어보셨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다시 킥보드를 잡고 심기일전해 발차기로 50미터를 돌고 왔다. 그래, 이 발차기야. 허벅지와 엉덩이의 힘으로 추진하고, 발등으로 물을 끝까지 누르면서 최대한 여유 있는 속도로 첨벙첨벙. 속도를 체크하며 빨라지지 않기. 


이번엔 팔젓기다. 반대 손으로 킥보드를 잡은 채로 한 손으로는 물을 잡고, 배꼽까지 물을 당기고, 허벅지까지 저어서 물을 밀면서 다시 물밖로 꺼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발차기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하면 된다. 여유 있게 하나! 둘! 팔 젓기의 추진을 느껴본다.  


자, 마지막 대망의 호흡.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고, 골반과 어깨를 열어 필요한 만큼 몸을 롤링하고 얼굴을 반만 돌려 크게 숨을 들이쉰다. 흠.... 파합! 고개는 팔보다 빠르게 물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얼굴을 띄운 동안 가라앉은 몸의 부력이 회복되니까. 역시 킥보드가 있을 때는 그래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세 바퀴를 돌며 기본기를 다시 복습하고 다시 맨 몸으로 레인에 섰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어차피 발차기가 되면 팔 젓기가 안되고, 팔 젓기가 되면, 호흡이 안되고 하는 시간이 좀 있을 거니까, 무엇보다 발차기를 아주아주 천천히 하세요. 바른 자세가 망가지면 아무것도 안되는 거예요." 


나는 이미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맨 몸으로 물에 서면 뭔가 비장해진다. 머릿속에 기억하고 해내야 할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뭐든 툭 건드리면 나올 정도로 숙달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 머릿속엔 이것저것 몸부림과 발버둥이 떠다닌다. 두 번째 도전에서도 역시 나는 너무 조급해졌다. 자꾸만 숨이 가빠지고, 자꾸만 자세가 무너진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완성 동작들은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 분명 다 배웠었는데. 분명 진도가 빠르다고 좋아했는데. 역시 나는 안되는가 봐. 속상한 감정이 물결을 타고 저만치 앞서 간다. 자꾸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받으면서 하면 몸에 힘이 들어가서 안돼요. 너무 힘들면 배영도하고, 잠영도 하고 좀 놀고 오세요."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수영을 오래 한 이의 구력으로는 수영이 잘 안 되는 사람의 짜증까지도 읽히나 보다. 그냥 그대로 누워 물 위에 떴다. 온 힘을 빼고 물 위에서 발을 올려 찬다. 숨만 잘 쉬어지면 수영은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천천히. 어느 순간엔 결국 익숙해진다. 잘 하든 못 하든, 나는 수영을 배우고 있다. 잘하고 싶어 하고 있으니까, 포기만 하지 않으면 결국은 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지금은 어떤 것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도 너무 혼란스럽지만, 부족한 나를 인정하면서 '해내고 싶어 노력하고 있는 지금'을 믿기로 한다. 지금이 얼마큼 쌓여야 이내 잘 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원하는 나'는 결국 '포기하지 않는 나'가 만든다. 


몇 바퀴 배영도하고, 잠영도 하면서 조금은 몸에 힘이 빠졌다. 선생님은 나에게 발차기의 속도부터 바로잡아 준다. 


"하나 두울 세엣 넷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급할 것 없으니까 발을 천천히 차면서 차근차근해보세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많이 차지도 않고, 그럼 숨쉬기도 여유 있게 할 수 있어요." 


숨이 차다는 건, 내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무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무리하면서 숨이 턱에 차오르는 불안감에 휩싸였을 때, 킥을 더 빨리 차면 더욱 무리하게 된다. 결국 25미터를 다 가지 못하고 중간에 일어서 숨을 몰아쉬게 된다. 사실은 중간에 일어서 몰아쉬는 것도 괜찮다. 어떤 나여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으니까 '여유를 갖는 것'만 잊지 않기. 


아직은 자유형이 그래도 어렵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킥을 차자고 다짐한다. 수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뭐든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쉽게 포기하는 일이 마음에 쌓이면 나조차 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천천히, 즐겁게, 할 수 있는 만큼, 하지만 결국 될 거라는 것을 믿기. 삶에서도 무리하다 숨이 차서 힘겹게 지나온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결국 포기했던 일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해낼 나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무리했기에 일어난 일들이지 않았나. 


꾸준히 정성껏, 부족한 내가 직면하는 불편함을 서둘러 한계라고 규정짓지 않고, 나만의 속도를 지켜가며,
부족한 나를 인정해가며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 그렇게 나를 믿으며 나를 데리고 살아간다. 단번에 잘하진 못해도 돌아보면 삶의 시간 동안 해냈던 것이 많은 나였다. 서툴러도 하나하나 헤쳐오며 즐길 줄 알던 나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차곡차곡 쌓여 만나는 내가, 지금의 나다. 


자유형을 배우며 겪은 멘붕은, 또 이렇게 삶에서 가지고 갈 점을 가르쳐준다. 이러니, 수영을 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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