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할 때도, 가라앉을 때에도, 떠오를 때에도.살아가는 동안에도.
배영을 처음 배울 때 나는 자꾸만 옆길로(?) 샜다. 분명 레인의 한편에서 열심히 발을 차며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왕복 레인을 침범해 역주행하는 대각선 주행을 했다. 골반이 틀어진 걸까, 어깨가 틀어진 걸까? 발차기하는 한쪽 다리의 힘이 더 센 걸까. 자꾸 대각선으로 수영하며 함께 레인을 쓰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다 보니 배영에는 자신이 없어졌다. 천정을 보고 똑바로 가려고 하는데도 나는 자꾸만 비뚜름하게 가고 있었다. 우아하게 몸에 힘을 빼고 수면 위를 플로팅 하듯 배영을 하고 싶은 내 마음과는 영 딴판으로.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면 물어나 보겠는데, 하체가 가라앉는 사람, 발차기가 끝까지 물을 차올리지 못하거나, 코어에 평행이 무너지는 사람은 있어도, 나처럼 비뚜름하게 가는 사람은 없어 보이니 홀로 심각했다. 실내에서 연습을 하니 망정이지, 본래 수영은 물속에서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기술일 텐데,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발을 차고 물을 잡고 있는 모습이라니.
열심히 비뚜름하게 갔다가 중간에 서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비뚜름하게 갔다가 일어나서 돌아오며 연습을 거듭하던 나를 보고 선생님이 한 마디 해주신 말씀.
"머리가 비뚤어져서 그래요."
머리라니. 줄곧, 반듯하게 물 위에 누워서 배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골반이나 양다리 힘 불균형이 아닌, 머리가 비뚤어진 탓이란다. 다시 물 위에 몸을 띄우고 머리를 방향타 삼아, 천장의 조명을 보며 내 몸이 비뚤어지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해 머리의 각도를 바꿔보았다. 오오. 더 이상 비뚤게 가지 않는다. 머리가 바로 서니 몸의 평형도 바로잡힌다. 양다리의 힘 조절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고 우아하게 물을 수면까지 차며 민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머리의 방향만 바로 하면 되는 거였다.
물에 몸을 띄우고 나름대로 몸에 집중하며 열심히 배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 머리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니까, 열심히력이 너무 올라오면 '무엇을 위한 열심히인가'를 모르거나 까먹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만일 내가 배영을 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면 목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를 내려다보는 건 (특히 배영 초보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영 선생님은 그런 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객관적인 입장에서 피드백을 줬다. 그리고 단지 한마디의 피드백인데도 방향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평영을 배울 때도 처음엔 몸이 가라앉는데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발차기를 하고서 몸이 글라이딩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몸을 띄우는 데는 머리의 방향이 중요하다. 잠영을 할 때도, 심지어 자유형 숨쉬기를 할 때도 목의 각도와 머리의 방향은 몸 전체의 방향과 평형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열심히력이 뻗쳐 목에 힘을 주면 자세 교정은 더욱 어려워진다. 머리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롤링하면서 목이 방향을 잡아갈 수 있도록 시야 안의 기준을 잡고 응시하며 방향을 잡는다. 몸을 둘러싼 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바라본다. 방향이 정해져 있다 해도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한 호흡 한 호흡, 배운 것에 집중하며 머리의 방향을 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춰 조정해 나간다. 함께 가는 길에는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따듯한 관심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관심이나 혹여 부러움일지라도 내 몸이 레인을 따라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데에는 약간의 부력도 되지 않는다. 의존은 하지 않되, 감사한 관심을 취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참고한다. 내 머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에 어디로 가야 할지 자유롭게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다만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를 때, 열심히력에 매몰되지 않도록. 오히려 내 몸의 전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다시 머리의 방향을 잡자. 머리의 방향만 잘 잡을 수 있다면, 물살이든 삶 살이든 나는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