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는 일, 좋아하세요?
20대 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못다 이룬 꿈 때문에 방황하던 시절 편집디자인을 배워 잠깐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2년 반 정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7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해보기도 하고, 월급이 3개월을 밀려보기도 하면서 이 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학원에서 배운 실력이라 더 나아갈 자신이 없기도 해서 고민하던 때, 마침 기획자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선배의 제안을 따라 기획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획자로 여러 해을 일하다가 독립하기 전 마지막 회사에서 우연히 조직문화 책의 PM을 맡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많이 서툴었는데 어찌저찌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하고 나니, 이 경험이 나를 전문가로 만들었다. 이후로 조직문화 관련 프로젝트들이 내게로 밀려왔다. H그룹, H은행, K사 등 연달아 큰 회사의 조직문화를 집대성하는 일을 하며 조직문화에 관한 무언가가 내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S사의 일하는 방식을 개발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많은 경험들이 찐 역량이 되어 컨설팅이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조직문화 프로젝트가 더는 어렵지 않았다.
독립하여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조직문화 일이 나를 먹여살렸고, 법인으로 회사를 시작하면서도 조직문화 일이 가장 많이 들어왔다. 그렇게 기업들의 조직문화를 다루다 보니 트렌드에 따라 자연스레 교육을 하게 되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참으로 어색한 I로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역할이었으나 이 역시 3년 즈음 지나니 편안해졌다. 이제는 스스로 강사라 말해도 될만큼 익숙해졌다.
계획되지 않은 길도 내 길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냐고? 내 커리어는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따라서 자연스레 이어져왔다. 어쩌다 주어진 일을 해내고, 해낸 일이 다음 일로 이어지고, 하다보니 전문성이 갖춰지고 그 전문성을 토대로 또 다른 영역으로 나아갔다.
언젠가 경험과 경력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후배와 나눈 적이 있다.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회사에 다녔던 나는 PM으로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해서 좋았지만 후배는 경험이 경력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는 그 이야기에 동의했었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이너로 가는 길이 있고, 기획자라면 기획자로 성장하는 길이 있다고 믿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정해진 길은 없는 거 같다.
내 의지대로 하고 싶은 것을 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주어진 대로 충실했던 순간들이,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렇기에 더 특별해지고 고유해 진다고 생각한다. 꿈을 쫓는 것 만큼이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성장하는 것도 하나의 완전한 삶의 방식이다. 예상치 못한 길에서 만난 나만의 전문성이 지금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