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7 북한산 기자능선
다희는 독서토론을 하며 만난 친구지만 산에서 더 친해졌다. 2020년 3월, 그러니까 2년 전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던 봄, 다희와 처음으로 도봉산 오봉을 올랐다. 도봉산을 시작으로 북한산, 불암산, 수리산, 청계산, 삼악산, 유명산, 한라산, 지리산 등 전국으로 다희와 산을 다녔다.
산에서 다희는 누구보다 듬직했다. 걸음이 빠르고 겁이 없어, 늘 나보다 앞서가며 안전한 길을 알려줬다. 손을 벌벌 떨며 칼바위를 올랐을 때, 백운대에서 어떻게 내려갈지 몰라 쩔쩔맸을 때, 조령산에서 단풍잎이 쌓인 내리막길에 미끄러져 주저앉았을 때, 늘 다희가 있었다. "언니 떨지 마요"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던진 다희의 한마디에 울렁이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바위를 올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랜만에 만난 다희는 그대로였다. 깃털처럼 가볍게 총총 오르는 발걸음, 때때로 하이텐션이 돼 수다스러워지는 입, 그리고 길이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길을 가리키며 '언니는 저쪽이 편하겠어'라고 알려주는 내비게이터의 본능까지. 이날도 다희가 리딩을 했다. 2020년 봄에나 2022년 봄에나 그녀는 변함없이 든든한 '내비게이터'였다.
다희는 기자능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기자능선은 '바위산'이라는 북한산의 명성을 실감케 하는 코스다. 들머리인 기자촌공원지킴터를 지나 조금만 오르면 암릉이 시작된다. 대머리 바위부터 향로봉까지 암릉과 평지가 반복돼 오르는 재미가 있다. 기자능선을 처음 갔을 때 바위산을 좋아하는 다희가 단번에 떠올랐는데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산에 친구를 끌어들이고, 산에서 새 친구를 사귀다 보니 휴일의 많은 시간을 산에서 친구들과 보낸다. 이젠 안국이나 홍대보다 북한산이 있는 불광역에서 만나는 게 익숙하고, '다음에 보자'는 인사보다 '다음에 산에서 만나자'는 말이 더 반갑다.
흔히들 '학창 시절 친구가 전부'라고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얼마 전 계룡산에서 한 친구가 아이젠을 놓고 온 일이 있었다. 다른 친구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아이젠 하나를 내줬다. 남은 길에 얼음이 깔려있고 넘어질 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 친구는 망설임이 없었다.
폴대를 빌려주고, 짐을 들어주고, 끊임없이 괜찮냐고 물어주고, 내가 산에서 받은 모든 호의는 단순히 같이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함께 보낸 시간은 분명 짧지만 그 이유로 관계의 농도까지 얕다고 할 수 없다.
내게는 '산 친구'가 있다. 같이 산을 탄다는 이유로 보폭을 맞춰주고, 같은 풍경에 감탄하며, 함께 올랐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나를 두고 가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