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색 물빛과 파라다이스
이 색상의 선택은 심리적 요인일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하루 일을 마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은 온종일 모아둔 아이들의 배변훈련팬티를 손빨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팬티의 개수를 세아려보니 대략 20장여 남짓된다. 그나마 산책하고 오느라 기저귀의 도움이 있어서 이 정도지, 만일 온종일 썼다면 30장은 족히 넘게 나왔을 듯 하다. 10장 정도 더 늘어난다고 해서 노동량이 극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므로, 그건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손빨래를 하게 된 걸까.
땅으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의 체력을 애써 부여 잡으며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보통은 10시 정도에 손빨래를 할 수 있었다. 특별히 다른 날과 차이가 있었다면 새롭게 들인 스텐펜 2개를 연마작업 했다. 키친타올에 식용유를 발라 구석구석 닦아주고,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방법을 더 찾아보았다. 친절한 인터넷 상의 설명에 따라 기름과 베이킹소다를 섞어 또 한번 구석구석 바른 후, 뜨거운 물로 주방세제를 칠해 헹구었다. 정말 이게 전부인가 싶어서 추가로 찾아보니 물과 식초를 1:9의 비율로 섞은 뒤 펜에 넣고 15분 이상 끓여주라고 했다. 가열하면서 틈새가 열려 숨어있던 연마제가 나온다고 했다. 식약처의 공식 설명이라고 하니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설명이었다.
세면대의 동전만한 크기의 배수구를 막고, 팬티들을 켜켜이 넣는다. 뜨거운 물을 틀어 빨래가 푹 잠기게 한다. 찰박찰박할 정도로 물을 채우고 빨래가 충분히 물기를 머금을 수 있도록 시간을 둔다. 그 사이에 요리책을 펼치고, 아기용 깍두기를 만들어본다. 아기도 깍두기를 먹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요리법이다. 나는 요리를 잘 못하는 편이라서 요리책을 쓴 사람들을 존경한다. 실시간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나 요리책이 없었다면, 우리집의 식탁 풍경은 상당히 단조롭거나 처참했을 듯 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다 싶어서 욕실로 갔다. 세면대에서 충분히 불어난 빨래들이 이제는 빨래를 시작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1000냥샵에서 구매한 2000냥짜리 목재 빨래판을 살포시 올리고, 나 역시 그들에게 이제부터 시작하겠다는 작은 신호를 보내본다. 그동안은 하얀색의 빨래 비누만을 고집했었다. 그 이유는 ‘EM'이라는 미생물이 들어있다고 그 비누가 포장지에서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EM‘이란 어떤 미생물인데 청소나 빨래를 할 때, 깨끗이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매스컴에서는 사실 그건 그다지 효과가 큰 것이 아니라고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둘 중에 무슨 말이 맞는지 고민하던 차에, 실제로 내가 느끼기에 ’EM‘비누로 빨아서는 애기들 대변이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아기들이 새로 세탁한 팬티를 입으면 자꾸 엉덩이를 긁어댔다.
이것이 나의 ‘바로미터’였다. 아기들의 반응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남아있던 마지막 'EM'비누도 다 사용했던 터라 새로운 비누를 사러 가게에 갔다. 많은 비누들 중에 ‘항균’이라는 문구가 강하게 표기된 것이 있었다. 뜨거운 물에 항균 빨래 비누를 적셔 팬티에 문질렀다. 하얀 거품이 일었고, 포근한 향이 났다. 헹굼물을 받아 팬티를 한 장 씩 헹구다보니 세면대에는 어느 샌가 에메랄드 빛 물이 가득 찼다. 비누의 색상이 에메랄드 빛이어서 일까, 아니면 오늘 같이 빨래한 초록색 아기바지에서 물이 빠지는 걸까. 마치 가본적은 없지만, 몰디브나 괌의 그 에메랄드 물빛이 아마 대략 이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물빛을 보고 있자니, 몸은 고되어도 지금 이 시간, 이 장소가 어쩌면 가족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파라다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더 자라도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어른들의 나이가 더 들면 건강에도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
항상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이런 마음이 든 순간, 벌써 마지막 헹굼물이 세면대 배수구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