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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Feb 25. 2022

저게 저절로 쓰여질 리는 없다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석주 시선집 /  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시다."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고요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장석주 시인의 오십 년 세월을 품은 아홉 권의 시집에서 가려 뽑은 시를 엮은 시선집이다.  시인의 말에 "돌이켜보면, 삶으로 시를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은 듯하다. 그동안 시가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라고 시에 사로잡혀 지낸 세월을 이야기한다.

저게 저절로 아름답게 만들어질 리는 없다. 대추 한 알이 저절로 붉어지고 저 혼자 둥글어질 리 없는 것처럼. 많은 이의 손길과 눈길이 더해져 장석주 시인이 시로 우주를 알아 간 오십 번의 계절을 담아냈다. 화가 이목을 작가의 <공 708> 그림을 수작업으로 표지에 붙인 만든 이의 정성이 넘치게 담긴 책이라 만듦새도 예사롭지 않다.





1부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2부 나는 이상하게 슬퍼지지 않는다

3부 우리 앞의 오늘도 벌써 옛날이지요

4부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네 부분으로 나뉜 시선집에는 66편의 시와 138개의 시에 대한 단상이 실려 있다. 장석주 시인의 시만큼 단상도 인상적이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고 깊이 파고든 사람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내공이 담겨 있다.

이 시선집을 읽으니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서 가수 전인권이 '제발'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담담하게 읊조리듯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담긴 세월과 목소리의 힘. 영상에서 노래가 시작되면 알 수 없는 울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한 사람의 생을 통과한 시와 음악은 보고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어제는 몹시 외로웠다고,
오늘은 못 견디게 그리웠다고,
너를 사랑한 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라고,
사랑하는 이에게 엽서를 쓰자.

_「내 마음속 용 -이중섭을 위하여」 부분, p.036


장석주 시인은 "시를 오래 쓴다고 내공이 쌓이지는 않는다."라고 했지만, "시를 줍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몇 개의 태풍, 천둥, 벼락을 품어야 하는 걸까. 시인은 또한 "결핍과 부재가 없는 삶에는 시가 깃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시는 사라진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이 잊히기 전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빈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자리에 고인 그리움을 들여다보게 한다.





유월이면 우리들은 설레며 땅속에서 둥글게 익어가는 감자들을
기다렸다 꽃은 상처였다
상처 없는 자 꽃을 피울 수 없고
꽃 피울 수 없는 자 열매 맺을 수 없었다

_「감자를 기리는 시」 부분, p.058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다." 시는 고요한 일상에 일렁이는 물결을 일으킨다. 명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인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서 시의 3대 자원인 "환상, 기억, 부재"를 통해 본질에 다가간다.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그늘이란 누군가 내게 내어주는
제 속마음인 걸 나는 안다
저 샘물도 누군가 입 틀어막고 참아내다가
터져나오는 울음이 아닌가

_「옻샘 약수터」 부분, p.088


압축파일을 지향하는 시를 압축 해제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기에 그저 읽고 바라보았다. 시인의 시선이 흘러간 마음길을 쓴 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좋은 시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것. "시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지도다. 그 지도 속에 생의 지도가 숨어 있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숨은 여백을 들여다볼 뿐이다.




136
검은 시루 속에서 물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
날마다 물을 주지만 물은 시루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머물지 않아도 콩나물은 쑥쑥 잘 자란다.
시루 안에 콩들은 시의 씨앗들이다.      _p.187


4부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은 한 편의 시이자 시론이다. "우주를 한 줄로 축약하되 넘치지 않는 시인의 능력"에 기대어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었다. 많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검은 시루 속에서 물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처럼 날마다 시를 읽어도 시는 몸을 관통해 빠져나갈 것이다. 시루 안에 시의 씨앗들이 자라듯, 시가 흘러간 몸 안에서 시가 싹트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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