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버렸던 것 중에서 가장 아까운 게 바로 일기장이다. 그나마 숙제로 조금씩 써놓은 것까지도 버렸으니. 그게 귀하다는 것을 나이를 먹고 나서야 알았다.
어렸을 적 나는 참 희한한 습관(버릇)이 하나 있었다. 일기를 며칠 써놓고는 안 쓰다가 나중에 또 쓰려고 일기장을 펼치면 앞에 쓴 일기들을 모두 찢어냈다. 앞서서 내가 쓴 내용들을 읽기 싫었고 뭔가 무안하고 민망한 느낌이 올라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해야 할까. 일기라서 창피했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그때 내용을 읽어봐도 별 내용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어릴 때 보이는 건 달랐을 테니까. 간혹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뭐가 그렇게 싫었을까. 왜 그렇게 찢어냈을까.
나는 어렸을 적에 지극히 내성적(내향적)인 아이였다. 부끄러움도 많고 스스로 생각을 잘 얘기하지 못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거절하거나 내 주장을 하면 뭔가 미안한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삶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 '남'에게 맞춰져 있었던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치를 보고 (나를 누르고) 남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면의 나'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국민(초등) 학교 6학년 때 학급 문집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학급 각 아이들의 이름을 쓰고 수식어를 하나씩 붙였는데 내 수식어는 '고개 숙인'이었다. 물론 내가 정한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을 맡은 친구들이 평소 나를 보고 떠오르는 대로 썼을 것이다. 그렇게 보일 정도로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
어릴 때 쓴 일기장은 지금 나에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찢은 것은 그저 일기장이 아니었다. 과거의 내 생각과 삶을 찢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이었고 어떤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나는 뭔가 변화를 바란 것이다. 그 방법을 잘 몰랐을 뿐.
나이를 먹은 후로는 일기를 찢어버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펼쳐보고 싶지 않은 내용들은 여전히 있다. 내가 그 내용들을 펼쳐보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그 어떤 변화를 이루어냈다는 뜻이 된다. 그때의 나를 마주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찢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