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01. 고승호 사건의 큰 뼈대는 살렸으나 살은 모두 상상력으로 덧붙였다.
일러두기 02. 청일전쟁에 연루된 각 개인의 시선으로 풀어내고자 했으며 청의 군사 중 한 명의 입장이라고 상상하며 썼다.
일러두기 03. 몇 차례 검토를 거쳤으나 고증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일러두기 04.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소설처럼 썼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선포하지만 싸우고 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다.
Older men declare war. But it is youth that must fight and die.
- 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 1944년 -
1894년 7월 25일
톈진(天津)에서 출발한 우리 배는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앞서서 출발한 배 두 척은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았다. 우리 배가 마지막이었고 가장 많은 병력을 싣고 있었다. 갑판에서 바라본 바다는 잔잔했지만 마음들은 그렇지 않았다. 반란을 막으러 간다는 소문도 들렸고 일본도 조선에 군사를 보냈다는 소문도 들렸다. 어쩌면 일본과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 또한 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이름은 고승. 높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영국 상선이었고 선장도 영국사람이었다. 영국 국기가 높은 곳에서 펄럭거렸다. 그 아래 나를 포함한 1,100여 명의 군사가 고승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틀 가까이 배에서 지내다 보니 답답하고 갑갑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가면 조선의 아산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앞서 도착한 군사들과 합류하면 일단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땅에서만 지내던 우리가 바다 위에서 지내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멀미 때문에 허연 얼굴로 내내 지내는 이도 보였다. 그나마 갑판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게 위안이었다. 어서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뱃머리 쪽에서 앞을 바라봤다.
아침 8시 30분경.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가 하나 보였다. 급해 보였다. 모양새는 군함이었는데 지나쳐 가는 걸 보니 우리를 호위하러 온 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별 다른 말들도 오가지 않았고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선교 쪽을 흘긋 봤지만 모습은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저 앞에서 또 다른 배 세 척이 나타났다. 우리와 점점 가까워졌고 옆으로 지나쳐 가는 듯했다. 모두 일본의 전함이었다. 아까 지나친 그 배는 뭐였을까. 이 전함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는 중이었을까. 그때였다. 선교를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분위기가 일순간 술렁였다. 일본 군함에서 신호를 보냈다는 것 같다. 따라오라는. 멈추라는. 이상했다. 일본의 전함이 우리를 세울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국인 선장은 그 전함을 따라갔다. 고승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닻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왠지 우리를 바다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불길했다.
일본 군함에서 작은 배 한 척이 건너왔다. 일본인이었다. 배를 살피는 것 같았다. 선교 쪽에서 영국인 선장과 독일인 고문과 건너온 일본군이 뭐라 대화를 하는 게 얼핏 보였다. 표정이 심각했다. 우리 군의 상관 몇 명도 같이 있었는데 독일인 고문의 말을 듣더니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전함으로 돌아갔다. 곧 입에서 입으로 소식이 전해졌다.
항복하라.
우리는 총을 들고 싸운 것도 아니고 전쟁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항복이라니. 왜 당황한 표정들이었는지 상관들이 왜 격앙됐는지 알 것 같았다. 영국인 선장은 독일인 고문에게, 독일인 고문은 우리 상관들에게 말을 옮겼고 또 그 반대로 말이 전해졌다.
죽더라도 항복하지는 않겠다.
결국 고승에서 일본 함선 쪽에 신호를 보냈다. 다시 작은 배가 건너왔고, 일본군들이 올라탔으며 심각한 표정들이 오고 갔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작은 배가 다시 돌아가고 선장과 고문은 뭔가 대화를 나누더니 우리 상관들과 대화를 나눴다. 상관들은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말이 잘 안 통한다는 답답함이었는지 팔을 들어 휘저었는데 우리가 온 방향을 가리키는 듯 보였다. 영국인 선장은 뭔가 사정을 하는 것 같았다. 고승에서는 일본 함선에 다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작은 배는 건너오지 않았다. 고승은 여전히 바다에 떠 있었지만 닻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고승에 묶여 있었다. 갑자기 배 한쪽이 소란스러웠다. 영국인 선장과 영국인 선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일본 군함으로 향했다. 우리는 우리를 버린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얼마 후. 일본 군함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물을 가르며 우리를 향해서 곧장 오는 것 같았지만 폭발은 없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일본 군함의 포가 움직이는 듯했다. 내 착각이었기를. 하지만 분명 우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침에 봤던 영국 국기를 쳐다봤다. 청의 군사들을 태웠지만 엄연히 영국의 상선이었다. 설마.
공격은 순식간이었다. 포탄은 하늘을 갈랐고 포성은 바다를 갈랐고 마지막에는 우리 몸을 갈랐다. 모두 고함을 질러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고함이 비명이 됐지만 들리지 않았다. 총을 든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 군함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대포에 소총이라니. 이마저도 안 한다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있었다면 돌이라도 던졌을 것이다. 빗나간 포탄들이 근처에서 물기둥을 일으켰다. 물기둥에 공중으로 떠오르는 몸들이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펄럭이던 영국깃발은 바다에 빠져 넘실거렸다. 그 주변으로 시체가 떠다녔다. 갈라진 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생지옥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일본 군함은 우리와 전투를 했다. 아니, 학살이었다. 억울했다. 적군과 싸워보기도 전에 죽음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게. 땅에서만 싸워야 하는 우리가 바다 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옆구리를 맞은 우리 배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갑판의 반대편으로 향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굉음이 들렸다. 밖에서 들어온 소리가 아니라 안에서 나온 소리였다. 포성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엔진이 폭발하면서 고승은 철저하게 죽었다. 뱃고물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우리는 뱃머리로 몰려갔다. 그 와중에도 포격은 계속 이어졌다. 욕이 절로 나왔지만 목구멍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이미 가라앉고 있는 배였지만 포격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잠잠해졌다. 그제야 들리기 시작했다. 살려고 하는 목소리들이. 바다에서 벗어나려 발길질을 해대는 소리가.
일본 군함에서 작은 배를 내려 보냈다. 일본군으로 채운. 우리를 포로로 잡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포로로 잡히는 게 나으려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아니다.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물에 떠다니는 몸들을 부러워해야 할 것 같은 처지에 절망감이 다시 몰려왔다. 그 작은 배는 우리 몸뚱이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서는 한 서양인을 올려 태웠다. 그러고는 살자고 발버둥을 치는 이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구명보트에 탄 우리 군을 향해서도 무차별로 쏘아댔다. 아까 내뱉지 못한 욕이 이제야 튀어나왔다. 포로로 잡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자들 파편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왔을까. 가까스로 뭍에 다다랐다. 이게 꿈인 건가. 파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를 땅으로 몰았다. 기진맥진한 채로 돌아봤다. 바다는 고승이 내뿜던 연기까지 삼켜버렸다. 나 말고도 죽을힘을 다해 뭍으로 헤엄치는 이들이 보였다. 이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분노가 올라왔다. 비겁하고 비열했다. 전투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군인으로서 싸울 기회를 빼앗아 갔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우리를 잡으러 온다면 가진 것도 내놓을 것도 목숨뿐이었다. 우리는 섬 안으로,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