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01. 풍도 해전의 시작과 전개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전쟁은 누가 옳은지 결정해주지 않는다. 누가 남을지만 결정해 준다.
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Only who is left.
- 버트런드 러셀 -
1894년 7월 25일 새벽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의 군함 두 척이 닻을 끌어올렸다. 제원호와 광을호. 톈진에서 군사를 싣고 오는 고승호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육지를 뒤로 하고 섬 사이로 배를 몰았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일본 군함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청의 군함 두 척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따돌려야 했다. 더 먼바다로 나가야 했다. 멀어지려고 하는 청의 군함을 보면서 일본 군함은 눈치를 챘다.
당황하고 있구나.
일본 군함들도 속도를 높였다. 당황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 이제 의도는 분명해졌다. 일본 군함은 청 군함을 그냥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두 나라의 전쟁은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쫓기는 절박함과 쫓는 조급함. 도망하는 조급함과 추적하는 절박함. 같은 감정들이었지만 자리가 달랐다. 아직 멀었지만 감정들은 이미 그 사이를 휘감아 채우고 있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야속하게도 군함 간 거리는 점점 좁아졌다. 3km쯤 남았을까. 일본 군함의 포격이 시작됐다. 포탄은 제원호와 광을호를 때렸다. 운도 나라의 명운을 따라가는 것이었을까. 가라앉는 청과 떠오르는 일본. 일본 군함에서 쏜 포탄은 제원호의 사령탑을 명중시켰다. 그 뒤로 기어이 조타 장치까지 박살내고 말았다. 당황이 공포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겁에 질린 이들은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공포의 명령을 따라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을 다시 제자리로 보내는 방법은 하나였다. 더 큰 공포. 몇몇 지휘관은 총을 꺼내 겨누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안 들려도 총구가 하는 말은 명확하게 들렸다.
제자리로 돌아가서 포탄을 장전하라.
조타 장치를 고쳐서 배가 움직이도록 하라.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 물기둥. 화염. 연기. 고함들. 비명들. 소리조차도 못 내고 얼어붙은 표정들. 반격은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광을호는 제원호보다 더 운이 없었다. 일본 군함의 포탄은 광을호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심장을 짓이겼다. 보일러실을 건드려버린 것이다. 뚫린 옆구리를 바다가 채우기 시작했다. 광을호는 서서히 기울었다. 함장은 빠른 결단을 내렸다.
배를 포기하라.
광을호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최대한 땅에 가까워지려 했다. 그 사이에도 바닷물은 배에 들이쳤고 일본 군함의 공격도 들이쳤다. 불과 물과 연기. 총탄과 포탄.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 기를 쓰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운이 좋은 이들은 빠져나갔고, 명이 다한 이들은 광을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제원호의 조타 장치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원호는 속도를 내어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군함의 속도는 제원호보다 더 빨랐다. 반격을 하기에도 손상이 컸다. 모든 상황은 제원호가 서쪽이 아닌 항복으로 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오는 배가 보였다.
쫓기는 이. 쫓는 이. 갑자기 나타난 이. 쫓는 이가 갑자기 나타난 이에게 눈길을 주는 순간을, 쫓기는 이는 놓치지 않았다. 제원호는 항복이 아닌 서쪽으로 향해서 속도를 높였다. 일본 군함들은 제원호에서 관심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두 척의 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배는 고승호. 그리고 고승호를 호위하는 조강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