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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7_무기력의 진화

by 서린

독감에 기어코 걸리고 말았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목감기인 것처럼 목에 붙어 있다가 결국은 머리로 올라와서 열을 내기 시작했다. 수액을 두 차례 맞고 나서야 회복이 되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후유증이었다. 독감을 기회로 삼아 콧물이 내 발목을 잡았고 무기력이 내 등을 업었다.


콧물은 처치가 쉬운 편이었다. 콧물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나 묘사하지는 않겠다. 문제는 무기력이었다. 이번 무기력은 이전에 온 것보다 더 강했다. 아니 교묘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혀끝부터 공격하다니. 무기력이 혀를 덮으면서 입맛을 잃었다. 의욕이 비켜선 자리를 맛으로라도 채워야 하는데 그 기회마저 빼앗다니. 입맛을 잃고 나니 폭음이나 폭식으로 무기력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때가 되면 먹을 뿐이었고 뱃속에서 줄을 당기면 입을 벌릴 뿐이었다. 맛이라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다니. 무기력은 의욕을 꺾고 입맛을 빼앗고 정신줄을 끊었다. 내 무릎이 꺾이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공격을 시도한 무기력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무기력은 몰랐다. 나 또한 대비를 해놓았다는 것을.


이전에는 무기력이 몰려오면 다시 물러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공격에 속절없이 당했고 성문을 굳게 닫아둘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난 후 잠잠해지면 다시 무너진 것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들이닥치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기만 했다. 지긋한 것들.


나는 성 안쪽에 큼지막한 대포를 하나 설치해 뒀었다. 대포는 앞에서 공격하는 콧물이나 무기력을 향하지 않았다. 가장 뒤에서 무기력을 지휘하는 본진을 향해 있었다. 처음에는 본진을 타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포탄 개수는 무한정이 아니었고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본진 방향을 향해서 포를 계속 쏘아댔다. 무기력을 계속 보내 공격하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어떤 포탄은 맞았고 어떤 포탄은 비켜 갔다. 맞을 때마다 본진의 정체가 점점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본진에서는 무기력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콧물도 멈추기 시작했다. 나는 빈 벌판으로 나서서 남아 있는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일상을 벗어나야 했다. 잠깐 멈춰야 했다. 내 안에서는 끊임없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신호를 무시하자는 건 아니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신호 위반이 계속 됐고 결국 연료가 바닥을 보였다. 결국 비상 브레이크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무기력이 몰아쳤다. 무기력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멈춰서 쉬면서 돌아보고 다른 곳도 좀 둘러보라고. 이제 그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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