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숨겨진 전투

by 서린

일러두기 01. 일본은 청일전쟁사에서 7월 23일의 전투를 지워버렸다. 숨겼고 모른 척했다. 일본은 궁을 침범했고 왕을 협박했고 조선을 유린했다. 청과 개전을 위한 빌미를, 조선을 지렛대 삼아 마련하고자 했다. 그뿐이었다. 우리 땅에서 시작된 전쟁이었으나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다.

일러두기 02. 구체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명칭을 쓰지 않았다. 상황 전개에 대한 묘사와 이해가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면 법은 침묵하기 마련이다.

Silent enim leges inter arma.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7월 20일. 일본 공사관에서 조선 조정으로 공문이 전해졌다.


청이 조선에서 군사를 물릴 수 있도록 요청하시오.


7월 22일 밤. 조선 조정에서 일본 공사관으로 답신이 갔다.


거부한다.


7월 23일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된 시간. 거부한다는 답신에 대한 회신이 경복궁을 향했다. 대오를 맞춘 발소리가 땅과 밤을 흔들기 시작했다. 용산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리를 들은 이들은 숨소리를 죽였고 소리를 못 들은 이들은 꿈속을 헤맸다. 타국의 군사들이 타국의 궁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일본의 병사들이 조선의 법궁을 둘러쌌다.


왕을 찾아라.


타국의 병사들은 그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법궁의 동쪽과 서쪽에 난 문 앞에 몰려들었다.


왕을 지켜라.


조선의 병사들은 그 명령에 따라 동쪽과 서쪽의 문 뒤로 몰려들었다. 문을 열려는 자들과 닫으려는 자들, 담을 넘으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이 뒤엉켰다. 일본에게는 기어이 해내야 하는 일이었고 조선에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일본의 병사들은 흥분하였고 조선의 병사들은 분노했다. 분노는 흥분을 덮을 수 있다. 하지만 흥분이 뭉쳐 광기가 되자 분노는 그 그림자 아래 묻혀 버렸다.


새벽 5시경. 서쪽 문이 열렸다. 영추문(迎秋門)이 깨졌다. 도끼로 문을 부수어 열자 타국의 병사들이 들이쳤고 조선의 병사들은 뒤로 몰렸다. 풍요를 빌고 가을을 마중하는 문이 정작 맞이한 것은 흥분한 병사들이었다. 분노 사이로 절망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왕을 찾아라.


총성이 끊어지지 않는 긴 밤이 이어졌다. 궁의 담장을 넘어간 총성과 함성은 아침보다 먼저 사람들을 깨워댔다. 깨어난 사람들은 잠들지 못했고 앉아있지 못했다. 있는 곳들은 다 달랐지만 보고 듣는 곳은 같았다. 그곳에서 조선의 병사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어이 아침이 해를 몰고 왔지만 궁궐은 더 깊은 그림자에 가려졌다.


아침 7시경. 일본 병사들이 왕을 찾아냈다. 일본 공사가 깨어진 궁궐에 입궁하여 왕 앞에 섰다. 함께 선 지휘관이 기어이 칼을 빼들어 위협했다. 왕은 무력했지만 숙이지는 않았다. 왕은 잡혔지만 총성은 꺾이지 않았다. 한낮이 되자 진짜를 가장한 가짜 왕명이 전해졌다.


조선 병사들은 무기를 버려라.


광기는 결국 분노를 잡아먹었다. 분노는 허탈로, 허탈은 슬픔으로, 슬픔은 울분으로 옮겨갔다. 조선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법궁에서 타국의 군사에 의해 무장을 해제당했다. 치욕을 당한 조선의 병사들은 울분을 삭이다 안 되면 무기를 내동댕이 쳤고 입은 옷을 찢어버렸다. 그러고도 안 되면 울어버렸다. 하지만 조선의 명운은 눈물로 다시 일으키기에는 너무 기울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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