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가라앉지 않는 배

by 서린

일러두기 01. 1894년 황해해전을 다루었다.

일러두기 02. 해전의 과정이 (내 입장에서) 꽤 복잡했고 청과 일본의 배 이름만 해도 30척에 가까웠다. 과정을 최대한 이해하려 했고 그를 바탕으로 요약하려 했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일러두기 03. 참고한 도서와 웹사이트는 아래와 같다.

1)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오타니 다다시, 이재우 옮김.

2) 위키백과(황해 해전)

3) https://www.summerpalace-china.com/ (중국 이화원 공식 사이트)



천하가 편안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

天下雖安 忘戰必危

-사마양저-


1894년. 자금성 북서쪽. 황실 정원 청의원(淸漪園) 보수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파괴와 약탈을 행했고 청의원도 그 불길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3년 후. 무너진 청의원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다. 서태후는 친히 보수 공사를 감독하였고 5일마다 서면으로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청 조정은 복구에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치욕을 담아서 버렸다. 그리고 이양충화(頤養衝和)라는 말의 앞과 뒤 글자를 따서 이화원(颐和园)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양충화. 몸과 마음을 길러 평화롭고 조화로운 상태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때 이화원 서호(西湖) 북쪽에 돌로 만든 배도 다시 물 위에 섰다. 서태후는 그 배에 강물이 맑고(清) 바다가 편안하다(宴)는 뜻을 실어 청안방(淸晏舫)이라 이름을 지었다. 만족스러웠다. 서양 오랑캐에 무너진 황실의 체면을 다시 세우는 것만 같았다. 돌로 만들었기에 뜰 수 없는 배였지만 서태후의 뜻에 따라 가라앉지 않는 배가 되어 물 위에 떴다.


청의 북양함대는 조선으로 향하는 지원군의 수송선을 호위했고 임무를 마쳤다. 함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나와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쉽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본의 함대가 북양함대 앞을 가로막았다. 그날은 1894년 9월 17일. 평양성을 빼앗긴 지 하루 만이었다.


청 함대는 부채꼴로 섰고 일본 함대는 그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활이 과녁을 향하는 모양새였고 쐐기가 벽을 향하는 모습이었다. 해가 하늘 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 포탄이 두 함대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일본의 함대는 청의 포격을 버티고 뚫으면서 북양함대의 날개를 쳤다. 오른쪽 날개 쪽에 있던 군함들이 그 공격에 휘청거렸다. 청의 군함 대포 끝에서 포화(砲火)가 피어났고 일본의 군함들도 떨어지는 포탄에 흔들리고 쓰러졌다. 청의 군함은 육중한 몸으로 적함으로 돌진하여 충각(衝角)하고자 했으나 닿지 못했다. 닿지 못한 청의 군함에 총과 포의 세례가 쏟아졌다. 일본 군함의 속사포를 떠난 총탄은 청의 장갑을 뚫지 못했으나 그 위에 선 병사들을 훑었다. 살아 서 있던 이들이 갑판 위에 죽어 누웠고 파란 바다는 붉은 피로 덮였다.


해질 때가 가까워지자 북양함대의 양쪽 날개는 모두 꺾이고 말았다. 꺾여버린 날개에 자리하고 있던 군함들은 도망하였고 일본의 함대들은 추격하여 쏘았다. 몇은 살아남았고 몇은 바다 아래로 잠겼다. 청의 군함은 8척이 침몰하거나 대파되었고 6척이 그 목숨을 이어갔다. 일본의 군함은 3척이 큰 손상을 입었고 10척이 살아남았다. 죽고 다친 청의 병사는 1,300명을 넘었으나 다치고 죽은 일본의 병사는 300명이 안 되었다.


북양함대는 패주 하였고 일본의 연합함대는 청과 조선 사이의 바다를 손에 넣었다. 평양성에서 도망한 군사가 압록강에 아직 닿지 못한 때였다. 땅에서 쫓긴 이들과 바다에서 쫓긴 이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었으나 쫓겨가는 곳은 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배 한 척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강물은 맑고 바다는 편안했으나 가라앉아야 하는 배는 떠 있었고 떠야 하는 배는 가라앉았다. 노을이 이화원 청안방을 붉게 덮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일전쟁> 기울어진 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