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공만 한 배신감이 있었던) 양산물문화관 인증센터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나는 이제 완전히 홀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자전거로 달리는 거리는 20분도 까마득했다.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줄지 않는 것 같은 착각. 쉬는 시간 20분은 그렇게 짧더니.
가장 먼 길을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 친구와 함께 가는 거라고 했던가. 자전거 도로 위에는 나 혼자였다. 자전거길이다 보니 행인도 없었다. 내 유일한 친구는 간식거리. 가다가 힘들 것 같으면 무조건 멈춰서 가방을 뒤적였다. 아이들을 나누어 주려고 많이 챙겨두었던 사탕과 씹을 거리가 내 입으로 계속 들어왔다. 너희는 같이 있기라도 하지. 정말 지금 생각해도 그때 간식거리라도 없었으면 상당히 힘겨운 사투가 될 뻔했다. 달콤함 자체가 위로였으니까.
서쪽으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멋졌다. 도시에 살면서 쉽게 보지 못한 풍경. 매일 한 번씩 찾아오는 노을이지만 일상에 가려져서 못 보고 지나가는 풍경. 짧기에 더 귀한. 그렇다. 노을은 짧다. 하늘 끝에 뜬 태양은 느리지만 산에 걸린 태양은 빨랐다. 노을 다음은 어둠이었다. 야간 운행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전에 두 시간을 걸었으니 두 시간 늦은 셈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좀처럼 쓰지 않았던 표현이 떠올랐다. 땅거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혼자 달리는 길에 어둠까지 깔리니 거리는 더 멀어졌고 마음은 더 급해졌다. 이제 20~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 이상했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라면 분명 아이들일 텐데. 그런데 보조 선생님이 같이 계시는데. (보조 선생님은 중간 지점에서부터 자전거로 합류를 하셨다.) 뭐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인데요. 잘못 온 것 같아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보조 선생님이 숙소 위치는 알고 계시고. 길이라야 한 갈래일 텐데.
"자전거 길을 따라서 왔는데... 다리를 건너서 왔거든요."
"다리?"
다리? 숙소로 향하는 길목에는 다리가 없었다. 다리라. 아뿔싸. 낙동강을 건넜구나. 우리가 묵을 숙소는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다.
"야, 다리 건너가면 안 돼. 숙소는 다리 건너기 전이야. 그럼 다른 애들도 다 거기 있는 거야?"
"아뇨. 저 혼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혼자라니.
"혼자라고?"
"제가 먼저 좀 달리다가..."
상황 파악은 둘째였고 일단 만나야 했다. 지도앱을 열어서 가장 찾기 쉽고 보기 쉬운 건물을 찾았다. 다행히 다리 바로 앞에 고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 다리 다시 건너서 와. 다리 건너오면 고등학교 하나 보일 거야. 거기로 와."
전화를 끊고 바로 보조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거기서는 학생 한 명이 실종된 셈. 전화기 너머로 염려와 걱정이 묻어났다. 통화가 되었다고 알리고 상황을 대략 설명 드렸다. 나는 속도를 올렸다. 내가 먼저 도착해야 했다. 내가 거기 먼저 서 있어야 했다. 자칫 엇갈릴까 걱정이 됐다. (달리면서 잠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래. 내가 무릎이 시큰해서 이렇게 뒤처진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길 잃은 학생을 찾을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진작 같이 달렸으면 이런 문제가 안 생겼잖아.) 그렇게 10분 정도 달렸을까. 다리 쪽에 도착해서 나는 알게 됐다. 자전거 길 안내 표지판은 강 건너로 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숙소고 뭐고 생각 안 하고 그냥 달리면 표지판을 따라가게 돼 있다. 그러니까 건너갔겠지. 이미 사방은 어두웠다. 시골의 저녁은 도시의 밤보다 깊었다. 나는 다리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을 응시했다. 이 시간에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건너오면 분명 그 학생이리라.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점점 다가오는 학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이랬다. 워낙 각 날짜마다 선두 학생을 정해두었다. 그리고 뒤에서 달리는 학생들은 그 선두를 지나쳐 가서는 안 됐다. 그런데 숙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한 학생이 미친 듯이 앞으로 치고 달려 나간 것이다. (뒤에서 불러도 안 들렸다고.) 그렇게 해서 목적지로 가면 다행이었는데 표지판만 보고 강을 건너간 것. 강을 건너서도 달리고 또 달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멈춰서 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저씨에게 핸드폰을 빌린 것이다. 못해도 5~10분 정도를 혼자 달렸을 텐데. 질주에 너무 몰입한 것이다. 그래도 나름 잘 대처를 한 것이어서 꽤나 대견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대처하는 법을 아는 것. 이런 갑작스러운 배움들이 숨어 있다는 게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지. 게다가 내 전화번호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자세가 됐구나. 준비가 잘 됐어.
나와 그 학생은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모두들 약간은 심각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이 심각하게 기다리던 장소는 치킨집 앞. 보조 선생님께서 첫날 고생 많았다고 저녁을 치킨으로 두 마리 시켜놓으신 것이다. 치킨 냄새를 맡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날 후로 한 가지 약속이 더 추가됐다. 선두를 치고 먼저 나가지 말 것. 첫날부터 우여곡절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그 학생이 내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상당히 감탄을 했었다. 그런데 진상을 알고 보니 자기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던 것. 아, 차라리 몰랐어야 하나. 그래도 그렇게 다른 사람 도움을 요청한 게 어디야. 이제는 함부로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