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쥐방울 Dec 07. 2022

하지 못했던 말

당장 회사 그만둬요.

입춘이 막 지났을 무렵이다.


입으로 들어간 건지 옷으로 먹은 건지 알 수 없을 아이의 식사를 마치고, 씻기고, 놀이 후 찾아오는 낮잠시간은 아이도 나도 힘든 시간이었다.

아이는 자기 싫은데 자꾸만 졸려서 이겨내려는 힘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결혼 전의 나였다면, '재우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육아지식은 1도 모르는 생각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 돌도 안된 아기의 낮잠을 건너뛴 날에 그 후폭풍을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낮잠이 필요한 아기가 이겨내려고 온갖 자극을 찾아서 헤매는 동안, 양육자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나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가 살기 위해 그 무렵엔 아기띠를 1시간 해서 30분을 재울 때도 있었고, 유모차에 태워서 낮잠을 재울 때도 있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위로 유모차가 지나갈 때면 영아산통이 있었던 첫째도 진정하며 잠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새벽에도 밤에도 밖으로 산책을 나갔던 시절, 걸어서 20분 거리의 친정으로 향하며 아기는 잠이 들었다.

배속에 둘째를 품은 만삭의 몸이었고, 두 손은 돌 무렵은 지나온 첫째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6차선 도로 옆 인적이 드문 보행길을 가고 있을 때 배우자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았는데 몇 초가 흘러도 말이 없었다.

순간 무언의 통화 중에 남편이 울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여자

"무슨 일이야"


그남자

"여보 나 회사 그만둬야 할 거 같아"


그여자

배우자의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버티고 버티다 말을 꺼낸 걸까.

첫째 아이가 잠들어 있는 유모차를 바라보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던 내 배를 바라보며 몇 초 후 대답했다.

"응"




배우자는 결혼하면서 같은 분야이지만 영업 쪽으로 이직했던 회사를 이미 훨씬 전부터 버거워했다.

가정을 꾸리며 더 보탬이 될 생각으로 업계에서 외국계 회사라 꽤 높은 연봉이었기에 이직했을 것이다.

밥먹듯이 하는 야근과 출장은 기본이고, 같은 동료가 욕을 하며 인신공격을 해서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부양할 자녀가 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으니 그 당시엔 본인 이외의 수입원이 없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 테다.


나 역시 배우자의 의견을 존중한다고는 했지만, 만삭의 몸으로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우니 그 현실을 어찌하지 못해 밤마다 첫째가 잠들면 많이도 울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유튜브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듣는 노래>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몇 시간 자고 나면 또 퉁퉁 부은 얼굴로 매일 육아하며 버텨온 나날이었다.


어찌어찌 격변을 보내고, 세 아이를 육아하면서는 자꾸만 그때가 떠오른다.

그때 배우자의 전화를 받자마자 현실 상황을 떠올리지 않고, 그 마음을 헤아려 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몇 초간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났던 때가 아쉽다.


그리고 만약 지금 나에게 그런 상황이 또 오게 된다면 어떨까


그남자

"여보 나 회사 그만둬야 할 거 같아"


그여자

"당장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요"


라고 말하고 당장 아르바이트 혹은 쿠팡 배달이라도 뛰면서 지속적은 수입원을 궁리하고 싶다.


아참, 우선적인 전제조건은 넷째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이다.

그 남자도 알고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 불편했던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