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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Dec 10. 2022

빌런이 살고 있다.

눈이부시게 수상한

어느 토요일.


그여자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는 동안 첫째 아이는 친구와 두 시간 놀고 오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평일엔 가정 보육하는 둘째와 셋째를 비롯해 초등 1학년인 첫째까지 세명의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주말이 돌아오면 내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지는 못하더라도 주방과는 좀 멀어지고 싶다.

그도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주말엔 나들이 혹은 배우자도 함께 아이들과 질 높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남자

아이가 주말에 동네 산에 가자고 했었고, 아내는 토요일 오전에 짧은 운동을 다녀온다.

매일 주식창을 들여다보며 근로소득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어떻게든 가계에 보탬이 되어보려 경제 흐름을 유심히 살핀다.

퇴근 후 유튜브로 뉴스와 주식 관련 영상을 시청했지만 얼마 전 아들이 무선 이어폰을 공원에 몰래 들고나갔다가 던져버려서 분실 상태라 기분이 좋지 않고, 그 참에 아예 대놓고 취침시간에도 영상을 소리 높여 보는 중이다.

어차피 나만 잘살려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요즘 경제가 좋지 않지만, 특히 정치 쪽이 심란하다.

어느 정당의 압수수색이 이루어지면서 오늘 서초동 쪽에 집회가 있다는데, 가봐야겠다.


그여자

집회를 간다고? 서울에? 토요일? 주말에? 오늘?

What a Amazing!

무슨 집회인지 살짝 물어봤지만, 사실 듣고 싶지도 않다.

로망까지도 아니고 평범함을 바랐던 주말 일상이 깨지는 기분이다.

한마디만 물었다.

"행복하냐?"

난 안 행복할 거 같다.

나는 지금 오늘 당장의 행복이 중요하고, 오늘내일 아이들과의 약속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게다가 시어머니도 같이 가신단다.


그남자

아내가 화난 것 같다.

나보고 행복하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일까.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나중에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거라고.

아내에게 물었다.

"만약 80년대에 대학생이었다면 데모 안 했을 거 같아?"


그여자

시어머니는 친구와 같이 가신다며 결국 그남자는 혼자 2시가 좀 넘은 시각에 집에서 출발했다.

주말에 같이 집회 갈 30대 친구는 흔치 않았겠지..

아이들과 저녁을 먹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았다.

광화문 집회 라이브 채널이 몇 개 보인다.

설마 아직도 저기 있는 걸까.


그남자

행진을 마치고, 지하철과 광역버스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오다가 붕어빵 있으면 사 오라고 했는데, 안보이니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과 커피 두 잔을 사 왔다.

김밥 한 줄 먹었지만, 추운데 오래 앉아있고 오랜만에 제법 걸어서인지 출출한데 허리도 아프다.

내일 아이와 동네 산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이미 무척 피곤해서 큰일이다 싶다.


그여자

빌런이 돌아왔다.

가지밥을 주었다.

본인이 텃밭에서 따온 가지를 다시 본인에게 돌려보낸다는 느낌으로 차려냈다.

가지가지한다.

남편도 나도 허리가 아프다.

집에 마지막 남은 파스 두장을 나란히 서로 붙여주며 하루를 마감했다.




분명 방향은 같은데,

지금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한 그여자.

앞으로 미래의 행복을 챙기는 그남자.


이건 흡사, 아이를 양육하며 맞벌이와 전업을 고민하는 수준이다.

결국 둘 다 아이를 위한 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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