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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BRIDGE Jun 07. 2017

무비 브릿지 - 500일의 썸머

미숙했던 그 때의 사랑

    도심 속 어느 브런치 카페. 여자가 남자에게 천연덕스럽게 이별을 말한다. 여자는 쌓이고 쌓인 상처들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처받지 않은 듯 전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남자는 그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넋이 나간다. 분명 잘 사귀고 있었는데, 뭐가 문제였던 거냐며 억울해한다. 여자는 자신이 받았던 상처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저 "더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라는 말만을 되풀이한다. 남자는 당황스럽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이던 그녀가 이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니. 남자의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 찬다. 그 배신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에게 전할 뒷이야기가 남아 있는 여자를 뒤로 한 채.

    드라마나 영화로든, 아니면 라디오 사연으로든 흔하게 묘사되는 이별의 한 장면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 의 시작이기도 한 이 장면은 미숙한 연애의 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 커플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라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사실 이 둘의 연애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호감을 갖고, 자연스레 만남을 이어간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직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확신은 옅어지고, 이 사람이 진정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사소한 사건들이 쌓여 불신이 되고, 종국엔 사랑마저 옅어진다. 

    사랑을 흐릿하게 만드는 사건들이란 대개 사소한 것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그런 걸 누가 좋아해' 라면서 놀린다거나, 영화를 볼 때 우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별 거 아닌 문제들. '그럴 수 있지' 라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사랑은 식고 만다. 특히 썸머같은 여자라면 더더욱.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썸머

    썸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감독은 썸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Since the disintegration of her parents, she does only love two things. The first is her long dark hair. The second is how could she easily cut it off, and feel nothing.

    부모님의 이혼 이후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긴 머리를 아무 느낌 없이 잘라낼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즐기는 여자다. 관계에 얽메이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 부모님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가치관이다. 톰과의 회식자리에서도 그녀의 가치관은 여전하다. 누군가의 '누군가' 로서 존재하기 싫다는 생각. 나 자신으로서만 있으면서 관계가 주는 상처를 받지 않고 싶다는 마음.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에 톰의 자잘한 실수들이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나 찌질한 남자 톰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썸머는 그런 상처를 내비치려 하지 않는다. 애써 기른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내는 그녀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녀기 때문에 말이다. 관계에 있어 그녀는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고, 그래서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 탓에 톰은 자신이 썸머를 아프게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여러 실수를 저지른다. 다시 말하지만, 톰은 찌질했으니깐.

찐따다

    이 친구는... 좀 잘생기긴 했는데, 찌질한 면이 좀 많다. 지가 좋아하면서도 말조차도 못 걸지를 않나, 친구가 멍석 다 깔고 북치고 장구치면서 반주 다 깔고, 마이크까지 쥐어줘야 그제서야 '어... 너 좀 좋긴 해. 친구로서' 라고 소심하게 고백하질 않나. 진짜 친구였으면 몇대 쥐어박았을 법한 그런 친구다. 그 잘생긴 얼굴 달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사는질 모르겠지만. 솔직히 얼굴은 부러운데 하는 짓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 

    톰은 썸머와는 반대로 진정한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썸머 앞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사랑이 느껴지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자신의 앞에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오리라 믿으면서 산다. 그가 어릴 적 들었던 브릿팝에서 노래하듯 말이다. 

    문제는, 그가 정말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엘레베이터에서 톰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것도, 복사집에서 먼저 표현을 했던 것도, 회식자리에서 자신을 좋아하냐며 몇 번이고 되물었던 것도 톰이 아닌 썸머였다. 결국 싸우고 나서 먼저 상대를 찾은 것도 썸머, 계속해서 톰에게 맞춰간 것도 썸머였다. 둘의 사랑에서 톰이 먼저 무엇인가를 했던 적은 없다시피했다. 그 찌질함의 정점은 영화 후반부의 술집 씬에서 드러나는데, 다른 남자가 썸머에게 추근거릴 때는 조용히 있던 톰이, 그 남자가 자신을 욕하자 대뜸 주먹을 날린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톰이 이렇게까지 한심해 보이는 이유는 그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톰의 모습을 가지고 있거나, 한때 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찌질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차기를 팡팡 날릴 것만 같은 그런 행동들을 우리는 저지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톰의 행동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떠올리고, 그 시절 자신의 미숙함을 떠올린다. 

    썸머도 마찬가지다. 자존심 때문에, 상처를 줄까봐, 아니면 내가 상처를 받을까봐 속내를 끙끙 앓으며 부여잡고만 있던 적이 있었을 테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끌어안은 상처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결국 곪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상처들이 곪아서 터져나올 때쯤 또 하나의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500일의 썸머"는 미숙한 남자와 미숙한 여자가 만나서 미숙한 연애를 하다 헤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감독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지만,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라고 말했듯, 영화는 그저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발짝 나아가 미숙했던 한 쌍의 남녀가 성장해서, 보다 완숙한 사랑을 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썸머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믿게 되고, 톰은 더 이상 운명적인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방법을 깨달은 그는 지난번 연애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다가간다. 

톰의 새로운 계절, 어텀

        사랑을 하면 사람이 성장한다고들 한다. 새로운 사람과 함께 찾아오는 새로운 세상은 우리의 삶을 한 뼘 더 넓혀 준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는 동안 톰과 썸머는 함께 타오르기도, 서로에 데여 아파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 치고받는 사랑을 하면서, 때로는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는 사랑을 하면서 둘은 인생의 한 계절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때, 그들은 조금 더 농익은 채로 어른스러운 사랑을 하게 된다. 지난 계절에 자신이 했던 잘못들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조금씩 고쳐 나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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