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미술가 코디 최와 화가 세라핀 루이
일 년 전 어느 날, 저는 전 직장에 작정하고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출근을 하고 탕비실에서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본 타 부서 동기가 제게 '아티스트'같다며 이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취향이냐'라고 넌지시 묻기도 했고, 같은 디자인팀 과장님께서는 '작가'같다고 제 머리를 매만져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제게 물어왔던 사람들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부터 물어본 것일까요? 어떤 것을 보고 아티스트 같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아티스트의 구분은 애매합니다. 다양한 창조활동을 하는 이들을 '아티스트'라고 부릅니다. 주변에서 매력적이거나 독특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는 모습을 접하기도 했고요. 아티스트는 예술 활동, 곧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참고). 예술은 창작,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기준점 즉, 제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술을 평가하기에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아티스트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따로 운영하는 블로그에 예술 관련 주제를 한 번 썼더니 관련 주제에 대해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작가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의 신념, 의도, 철학 등을 인터뷰로 읽거나 따로 찾아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어렵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아르코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귀국 보고 전(2018)>을 개최했을 때였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2년마다 개최되는 국제 미술 전시로 '미술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현대미술 전시회다. (참고)
여러 작품을 둘러보다 제 눈에 들어온 코디 최 작가의 <생각하는 사람>은 왜 핑크빛으로 표현되어 있는가? 집에 돌아와 보니 궁금해졌습니다. 작품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작가가 그 당시 겪었던 상황은 어떠했을지. 코디 최의 <생각하는 사람>은 조각상이 거친 표면을 가진 핫 핑크였습니다. 조각상이 '핫핑크'인 작품을 본 적이 없었기에 전시장에서 틔었고 실제로 작품을 감상하면 '형광' 핑크인지라 광휘했습니다. 또한 작품 하단 부에는 상(像)을 위한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 속은 그저 어두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해석이 산으로 가는 지난한 여정, 방점을 찍었다고 적확했을 때 결국 노트북을 켜고 작품 해석을 찾아보았습니다.
한국 출신(한국계 미국인) 코디 최는 22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조각상 색이 그 '모양'인 것은 작가가 자주 먹었던 소화제 펩토 비즈몰(Pepto-bismol)의 색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선 국민 위장약으로 불릴 만큼 아주 흔한 약이라고 합니다. 낯선 미국 문화를 접해야 했던 작가도 위장약을 자주 복용했겠지요. <생각하는 사람>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로댕이 필연적으로 떠오르겠지만(패러디 작품이므로) '변기에 앉은 사람'도 연상시킵니다. 재료의 독특함을 드러내면서 서양미술사의 권위적 작품을 위트 있게 표현해 낸 것입니다(참고). 이 매력적인 작품을 보세요. 작가의 개성, 정체성, 다양성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되찾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수두룩합니다. 코디 최, 그는 제57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되었고, 비엔날레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한국에서 귀국 보고 전을 연 것입니다. 작품을 찾아보기 전 코디 최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핫 핑크'에 불과한 난해한 작품에 불과했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훑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예술가 세계가 흥미롭고 매력인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들의 세계는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파괴적이기도 합니다. 물감을 뿌리고(잭슨 폴록 작가-추상표현), 캔버스를 찢고(이임춘 작가-테어링 아트), 피아노를 부수고(백남준 작가-행위예술), 죽은 동물을 포르말린에 집어넣고(데미안 허스트 작가-개념미술), 생리대에 그림을 그려 전시하고(박윤영 작가-설치미술).
시초는 마르셀 뒤샹(개념미술 선구자)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기가 지날수록 그들(예술가)은 담대해져 가고 틀을 깨부수기 시작합니다. 예술가들은 그 세계를 영화로도 담아 영원히 회자될 수 있도록,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합니다.
영화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된 '세라핀'. <세라핀(2008) | 감독 마르탱 프로보스트>은 여류화가 '세라핀(1864-1942)'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받은 품삯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라핀은 땔감과 집세 낼 돈마저도 탈탈 털어 그림 재료를 사들입니다. 들꽃이나 풀, 심지어는 교회의 촛농까지 훔쳐다가 염료를 채취해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변변한 붓 하나 없이 캔버스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1912년 빌헬름 우데가 그녀의 그림을 보게 되면서 천부적인 재능을 후원하기에 이릅니다.
빌헬름 우데(1874~1947) |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구입하고 앙리 루소의 첫 개인전을 준비할 만큼 심미안을 가진 독일인 미술평론가이자 화상이다(참고).
그 후 빛을 보게 된 세라핀은 점차 광기로 변해만 가는데요. 여주인공 세라핀은 예쁘지 않습니다. 남자처럼 큰 덩치와 손톱에 낀 검은 때, 상투처럼 아무렇지 않게 틀어 올린 머리칼, 맨발로 청소를 하거나 강가에서 빨래를 해주고 동전을 받습니다. 늘 들고 다니는 등나무 바구니에는 언제나 우산이 놓여 습니다. 영화 내내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우산은 끝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에릭 사티처럼 그녀도 우산을 좋아하는 걸까? 싶었습니다. 왜일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의 '우산'은 '나약한 사람'이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참고).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세라핀의 나약하고 불안정한 심리를 우산이라는 소재에 담아낸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는 손에 닿을 듯 말 듯 펼쳐진 들녘과 울창한 숲, 가로수를 흔드는 바람, 극 중반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그녀의 독특한 색채감이 깃든 그림들을 보는 데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찮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준 그녀. 의자를 들고 천천히 언덕에 올라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롱 테이크 신에서 바람 소리처럼 그녀의 말이 들려옵니다.
슬플 때면 시골길을 걸어요.
그리고 나무를 만지죠.
새, 꽃들, 벌레들에게 말을 걸어요.
그러다 보면 슬픔이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