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대학교에 들어가면 자유로운 연애를 할 거라 생각했다.
벚꽃이 떨어지는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이 되어도 누군가를 만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가을에도,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에도 그런 기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오랜 시간 동안 연애를 해보지 못하고 있던 24살 무렵이 되어서도 사랑이라는 것을 두려워했다.
소개팅에 나가도, 학교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좋아 보이는 사람은 있지만 그게 내 사랑이 될지를 알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늘 물었다.
너 왜 연애 안 해?
소개팅해줄까?
적극적으로 해봐!
그저 부끄럽게 미소만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연애를 시작하는 방법을 몰랐고 무엇보다 여자라는 존재가 너무 어렵고 무서웠다. 소개팅을 나가도 애꿎은 커피 잔을 계속 만지작 거렸고,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면 내 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그만큼 모든 것이 어색했고, 최대한 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 어색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냥 떨리고 무서웠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 형태가 보이지 않아서 그저 두려워하며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어렵고 물어봐서 조언을 듣는다고 해도 그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었다.
이 두려움은 도대체 왜 생긴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10대 시절부터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 조금은 소극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무언가 새로운 걸 하기 전에 일단 무서움을 느낀다. 새로운 공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친구, 그 모든 것들을 처음 만나는 순간은 어색하고 어려웠다. 처음의 시간을 맞이할 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먼저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말을 걸면 그제야 내 안에서 말이 올라와 밖으로 뱉어진다. 그렇게 말을 뱉으면서도 시선은 땅이나 다른 곳을 향한다. 아마 과거에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런 점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랬으니, 아마도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가 보다 라며 넘어갔겠지만 말이다.
아마 대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더 본격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1학년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해서 나에 대한 소개를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한 명씩 앞으로 나가서 이름을 말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처음 발표를 하는 사람이 나가면서부터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두근두근, 점점 내 차례가 가까워져 올수록 심장소리는 커져간다. 쿵쾅쿵쾅. 여러 재치 있는 소개 인사말이 지나가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앞으로 나아갔고, 그 이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마나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그 두려움에 대한 기억뿐이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사랑이란 내가 느끼던 그런 서툴러서 생기는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사랑을 찾아 헤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런 두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주인공 엘라이자(셀리 호킨스)는 그런 삶의 두려움을 느낄법한 인물이다.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미항공우주국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자기 자신의 초라함 때문인지 그의 주변에는 가깝게 지내는 인물이 많이 없다.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옆집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가 유일한 친구들이다. 이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와의 ‘사랑’을 두려움으로부터 지켜낸다.
1960년대 엘라이자가 살던 미국 사회는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그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 당시엔 백인 남성이 더욱더 힘을 발휘할 시기였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엘라이자의 친구 젤다는 흑인이고, 자일스는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세 인물은 커다란 사회의 편견을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커다란 두려움은 스스로 그들의 삶에서 목소리를 막아버린다. 그저 존재감 없이, 평범함으로 살아가기도 어려운 그들은 그저 조용히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면서 스스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인물들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엘라이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을 계속 억누르고 있었다. 그걸 깨는 건 바로 무섭게 생긴 괴생물체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괴생명체(더그 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한다. 괴생명체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사람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다. 생김새 또한 무척이나 기괴하다. 물고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듯한 그는 물갈퀴를 가지고 있고, 물속에서는 숨 쉴 수 있는 아가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과 다르게 흑색인 피부와 등에 있는 지느러미는 처음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준다.
이 괴생물체는 왜 엘라이자에게 큰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졌을까. 두 존재는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처음에 그건 두려움이 깔려있었지만 그 감정은 조금씩 호감으로 바뀌어간다. 결국에 사랑으로 바뀌는 그 과정을 전부 보고 나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두려움을 없앴다고 할 수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두려워했던 엘라이자는 그를 억압하던 대부분의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탈피한다. 그의 마음엔 사랑을 지켜야겠다는 마음만으로 가득 찬다. 그 옆에 있던 자일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을 해버린다. 엘라이자와 자일스의 두려움을 없앤 건 바로 사랑이었다.
사실 상대방의 외모는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외모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 맨 처음 나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깰 기회를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에게도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몰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하지만 사랑은 내게도 찾아왔고, 외모가 그것을 만든 건 아니었다. 영화 속 엘라이자의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이라는 모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첫 연애를 시작하고 10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된 생각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는지,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이 어떤 식으로 오는지, 어떤 모양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옆에 있는 친구와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친구들을 만날 때 그 만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양과 감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게 보이지 않아 두려워했다. 각각의 모양을 똑같이 맞춰보려 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두려움에 시간을 그냥 흘러 보냈다. 물론 그런 시간들이 마냥 소비된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모양맞추기의 사랑을 시작했고, 여러 번의 연애도 했었으니까.
영화 속 엘라이자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다. 영화 속 엘라이자는 말을 못 한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괴생명체의 얼굴엔 그저 앞에 있는 엘라이자만 보일뿐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외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 내 단점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나 조차도 그걸 잠시 잊게 만드는 것.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은 계속 그 모양을 바꿔간다. 버스를 탄 엘라이자가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창문 밖에 붙은 빗방울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그 모양을 바꿔간다. 그렇게 하나의 큰 물방울은 주변의 영향에 따라 그 모양을 계속 바꿔간다. 마치 계속 변하는 사랑처럼.
나는 누군가와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사랑을 시작하고 나서 내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많이 없어졌으니까.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상대방을 사랑하면서, 상대방에게 집중하면서 잠시 잊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전보다 많이 없어졌다. 자유롭게 내 의견을 말하면서 상대방의 눈을 맞춘다. 더 이상 나를 낮추거나 숨지 않고 나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연애를 더 했다. 그때마다 경험한 사랑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완전한 사랑은 없었지만 그 사랑들에 푹 빠져있을 때는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랑 안에서만큼은 완벽한 존재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화 속에 등장하여 괴생명체를 돕는 사람은 사회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던 존재들이다. 장애인, 흑인, 동성애자가 힘을 합쳐 새로운 존재,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인 괴생명체를 살리기 위해 애쓴다. 이 연대를 만들어낸 건, 결국에는 사랑이다. 엄청난 압박과 두려움을 없애버린 힘. 그 힘을 보면서 과거의 내가 두려움을 없애버린 그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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