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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빗구미 Jan 26. 2024

너무 아파, 다 잊고 싶어 (아픔)

<이터널 선샤인>


찐득하게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날씨에 붉은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초입이었다.

마침 당시 자기 전 여자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말 수가 없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전화기 너머로 퉁명스러운 말이 흘러나온다.


너는 다른 사람한테 관심 안 생겨?

난 다른 사람 생각 안 하는데...

그래? 난 요즘 다른 사람 눈에 들어오던데.

응? 그래? 난 그런 거 생각 안 해.



그 말을 듣고 꽤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무너졌다. 아.. 상대는 벌써 마음이 멀어졌구나.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곧 무슨 일인가가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런 대화를 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별을 통보받았다.

내 가슴이 하나하나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2년의 시간 동안 좋았던 기억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아팠던 선선한 가을이 지나가고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이별 후 한동안 내 마음속에 길게 자리 잡았던 감정은 아픔이었다. 사실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가장 먼저 찾아왔다. 이별 통보를 받자마자 떠오른 건 바로 헤어지기 직전의 대화였다.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던데.."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와 만날 때 다른 사람을 보고 좋은 감정이 생겼구나. 그 사람과 새롭게 만나는구나.. 같은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혼재되어 돌고 또 돌았다. 마지막 대화는 꽤나 긴 시간 동안 내 안에 남아 나를 우울하게 했고 또 괴롭혔다. 그런 생각들의 바닥에는 나에 대한 실망감이 깔려있었다. 아..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분노로 시작해 나에 대한 실망감으로 끝이난 감정은 2년 동안의 연애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우면 그동안의 기억들이 마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단편적인 기억들, 웃는 기억, 다투던 기억, 행복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던 수많은 기억들. 그런데 그 많은 것들 중 좋았던 기억보단 나쁜 기억을 먼저 찾아내 꺼낸다. 분노 때문일수도 있다. 그 나쁜 기억을 꺼내고 또 꺼내 보다가 이내 그 기억들을 잊으려 무던히 애썼다. 지우는 방법은 그저 생각을 안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기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 기억들을 내 머릿속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생각을 안 하려 할수록 계속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기억이라는 건 왜 내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걸까. 나쁜 기억은 좀 지워버리고 싶은데 왜 그게 안되는 걸까.


이별을 맞이한 이후에 <이터널 선샤인>을 만났다. 개봉했을 때 못 봤던 이 영화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집에서 보게 된 것이다. 영화는 조엘(짐 캐리)이 얼마전에 이별한 연인의 나쁜 기억을 지우고 싶어 병원에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동의서를 쓰고 기억을 지우는 기계를 쓰고 잠이 든다. 조엘의 감정은 온전히 내가 느끼던 것이었다. 헤어진 연인과의 나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런 기계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조엘이 부럽기도 했다. 적어도 그 기억을 지우면 아픈 감정도 지워버릴 수 있을 테니까.



조엘의 전 여자친구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이미 과거의 기억을 지웠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클레멘타인을 본 조엘은 자신도 똑같은 시술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두 사람의 헤어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아픔을 주었다. 그 아픔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팠고 결국 그들의 모든 추억을 지우는 방식으로 서로를 잊으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기억 시술을 하는 병원으로 향한다. 그 아픈 기억들을, 과거 연인의 추억들을 모두 지우고 나면 진짜 행복할 수 있을까. 아픔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조엘이 기억을 지우는 순간을 영화는 독특한 화면으로 보여준다. 잠든 조엘은 그 기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아프고 화났던 다툼의 순간들 역시 지우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상대방의 한 순간만을 선택하여 남길 수는 없기에 조엘은 좋은 기억들이 지워지는 것도 막을 수가 없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도망가면서 좋은 기억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조엘의 모습을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 기억들, 그 좋은 기억들,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지. 남겨놓고 싶은 추억들.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기억들.


우리가 처음 했던 그 많은 순간들, 사랑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사귀는 사이에는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해 나에게 알려주었던 전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 그 모든 기억이 마지막의 분노로 뒤틀려버리기 전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전 여자친구를 괴물로 만들기보단 그냥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아픔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 영화의 전체 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우리 모두의 마음은 티가 없다. 각자 마음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그 마음 자체는 흠이 없다. 여기에 밝게 비추는 영원한 햇살은 바로 좋은 기억이나 추억들이 아닐까. 엄청난 아픔을 느끼는 건, 어쩌면 그런 햇살을 더 이상은 직접 볼 수 없고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우거나 잊어버린다기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 잘 밀어 넣어두는 것. 그 과정이 이별의 과정이고 그것이 끝날 무렵이면 어느 순간부턴 그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렇게 밀어둔 그 아픔은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따뜻한 햇살로 남을 것이다.


그 당시의 아픔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1년 정도는 아픔 속에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4가지 계절을 지나는 동안 그 아픔은 사그라들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좋은 추억들은 나의 티 없는 마음 안으로 조금씩 밀어 넣어두었다. 그 마음 안에는 여전히 그 햇살이 비치고 있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꺼지지 않고 빛날 것이다. 너무 아파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이제는 희미해졌다. 다 잊고 싶었지만 여전히 몇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니 어쩌면 같이 겪었던 좋은 기억들을 꺼내려면 꺼내어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꺼내지 않는다.


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과거다. 그 이별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리고 아픈 순간도 많이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현재를 살고 있고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내고 있다. 때론 행복하고, 때론 아프며, 한 편으론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큰 아픔이 있다면 마음 깊은 곳에 조금씩 밀어 넣는다.


영화 속에서 각자의 기억을 지운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는 대화를 나누고 다시 서로에게 끌린다. 그리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영화가 끝난다. 결국에는 한 번은 거쳐야 할 사랑이다. 악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나고 아픔을 마음 한편에 묻어야 내 인생이 완성된다. 그 마음의 퍼즐을, 자신의 성장을 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 바로 사랑의 아픔이다. 기억이 다시 처음으로 리셋된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그 사랑을 맞이하고 또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아픔은 나에게 결국 찾아오게 되고 나는 다시 그 아픔을 마음 깊은 곳의 햇살로 남겨둘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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