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년생 김지영>
결혼 이후 3년 정도 신혼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그러다 문득 '아이를 가져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0대 후반이었던 그때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40대가 더 다가오기 전에
아이를 키우기 시작해야겠다는 어렴풋한 생각만이 있었다.
꽤 자주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는 아이 생각 있어?
아니 아직 별 생각이 없는데..
우리가 주변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괜찮을까?
오빠 일이 그렇게 바쁜데 괜찮을까? 아이 볼 시간도 없잖아.
그렇긴 해.. 맨날 새벽 2-3시에 끝나서 집에 오면 아이 볼 시간도 없겠지.
양쪽 부모님 도움을 완전히 받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고..
우리 좀 더 생각해 보자.
늘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결론. 우리 힘으로는 아이를 키워낼 수 없겠다는 결론이었다.
직업의 특성이기도 했지만 부모가 둘 다 바쁘다는 건
아이에겐 꽤나 큰 타격이다.
그 모든 고민 속에는 아이를 키워낼 적절한 환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모만으로는 안되기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주변의 도움과 지원.
늘 그것들을 생각하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났다.
그 벽은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다. 2016년 6월에 태어난 아이는 나를 아빠라는 존재로 만들어줬다. 그건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한 이후부터 생기는 새로운 호칭이었다. 왜 그렇게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는지 생각해 보면 사실 별 이유가 없다. '왠지 낳아서 길러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나만의 아이를 만나보고 싶었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와 아내를 닮은 예쁜 아이. 우리의 2세. 하지만 그 모든 생각 이전에 거쳐가야 할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일단 경험해 보자'로 마무리가 되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재촉도 있었겠지만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우리 부부니까. 아이를 태어나 키워야 하는 것을 결정한 책임은 오롯이 우리에게 있다. 당연히.
밤낮이 바뀐 100일을 보내고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키워나가면서 내가 느낀 건, 생각보다 아이를 키워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나 남자인 나보다는 여자인 아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돕는다고 도왔지만 완벽하지 않았고, 낮에는 일을 하러 회사 사무실을 향해야 했다. 아내가 잠시 일을 잠시 쉬면서 짧은 육아 휴직을 쓰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에 더해 출산 직전 어머니 댁에 잠시 들어가지 않았다면 더욱더 힘들었을 일이었다. 포인트는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다행히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피해 갔다는 이야기다.
아내는 짧지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아이를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아내는 결국 커리어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고 독박육아에 스트레스받으며 점점 나쁜 심리적 상황이 이어졌을 것이다.
아이가 3살이 막 되던 어느 날, 우리 세 가족은 우리만의 집으로 독립을 했다. 가끔은 도움받을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우리 힘으로 온전히 아이를 키워내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외국에 있어 도움을 받기 어려웠고 아내는 재택과 사무실을 병행하며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나가야 했기에 퇴근 후, 주말 육아를 많이 도우려 애썼고, 집안 일도 최대한 도우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면에서 아내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어려웠다. 몸이 힘든 것보다 내 마음의 짐이 더욱더 무거워졌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지영(김유미)과 대현(공유)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심인물은 지영이지만 남편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현의 상황에도 공감이 갔다. 아이를 케어해야 할 낮 시간에 지영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간단히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물론 남는 시간도 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지영. 자신의 커리어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아이와 일 중에서 그는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보고 있다.
반대로 대현의 입장에선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지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기운이 없는 아내의 눈치를 보고 최대한 아이를 보고 집안일을 도우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 편은 불편하다. 물론 밖에서 힘들게 회사 일을 하고 나서 집에 와 또다시 육아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몸이 힘들지만 온전히 힘듦을 표현할 수 없다. 대현의 마음엔 불안과 불편함, 안타까움과 자괴감이 섞여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없다. 지영의 커리어는 끊겨버렸고 다시 그 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만약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아이는 누가 봐줄 것인가. 대현이 지영을 돕기 위해서는 회사를 그만두거나 육아휴직 제도를 쓰면서 잠시 쉬어야 한다. 매달 월급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는 없고, 육아휴직을 쓰자니 회사의 눈치가 보인다. 결국 누군가가 집에 자리 잡고 있어야 아이를 키워낼 수 있다. 그 몫은 오로지 지영의 몫이었다.
이 영화 속에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사회는 육아를 결코 돕지 않는다. 사회는 육아를 절대 이해해 주지 않는다. 개별 구성원들은 그 문제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회생활을 할 때는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꼭 누군가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건 바로 이 사회 시스템이다. 엄마, 아빠, 할머니, 외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이들 중 누군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쓰지 않으면 온전히 아이를 키워내기 어렵다. 사회는 육아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여러 지원 정책들도 사실 별거 없다.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이고 시간인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해나가기 어렵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아팠고, 또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꽤 오랜 시간 전부터 이 사회는 이 모든 문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장 내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사회 시스템에선 육아 문제를 해결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더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간을 희생해 키워내는 건 없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나와 아내는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있다. 가끔은 할머니나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지만, 등하교나 아이를 케어하는 건, 각자 시간과 일정에 따라 나눠서 하는 편이다. 그나마도 나와 아내 모두 재택근무를 병행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런 유연한 회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매일 새벽까지 일을 하고 퇴근을 했던 과거 직장에서는 절대 꿈꾸지 못할 일들을 지금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힘든 조건하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현재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케어하고 있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육아라는 것에 무엇이 진짜 도움이 되는 지원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사회적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출산율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워내는데 너무나 제약이 많고 사회적 인식은 구시대적이다. 그 상황에선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모두가 힘들고 불만이 많아진다. 결국 사회 전체가 변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결국 원래 방식이니까 계속적인 퇴보가 될 것 같다. 누군가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아이를 키워낼 수 있는 사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아이를 키워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이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지 않을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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