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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Jun 07. 2019

제도와 권위에 맞서는 그,
<닥치고 피아노!>

실험적이지만 근원적인, 동물적이지만 인간적인 그의 음악적 세계관


필립 예디케 감독의 <닥치고 피아노!> (2018)는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닥치고 피아노!>는 펑크 음악부터 시작해서 클래식까지 섭렵한 칠리 곤잘레스를 다루는데, 제도와 권위에 타협하지 않은 그의 기이한 행적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칠리 곤잘레스는 공간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대중매체의 평가를 인식하지 않다 보니 그의 음악은 실험적이고 굉장히 동물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타협하지 않은 감성을 드러내기 위해 근원적인 방법을 택했고, 그래서 그의 음악적 세계관은 인간적이라고 역설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의 음악에는 '굴곡이 있다(wechselnd)'


필립 예디케 감독이 칠리 곤잘레스의 자아와 자취를 뒤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나는 독일어는 'wechselnd'로, '고저가 있는', '변화하는', 혹은 '굴곡이 있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는 그에게 굉장히 자연스럽다. 칠리 곤잘레스는 자신의 음악과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과 본인의 음악을 검열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려고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솔로 피아노든, 펑크 음악이든, 랩이든, 협주든, 실내든, 실외든, 언더그라운드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 결과, 그의 음악에는 실험적인 태도, 근원적인 태도,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태도, 자연스러운 태도, 겸손한 태도 등 다양하면서도 굴곡 있는 인간의 태도가 녹아있다.   



'칠리 곤잘레스', 자아이자 정체성이자 세계관


칠리 곤잘레스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Jason Charles Beck이다. '칠리 곤잘레스'라는 이름은 활동명이지만, 어느 순간 그의 자아이자, 정체성이자, 음악적 세계관이 되어버린다. 그는 이 세상에는 예술가와 엔터테이너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가는 음악으로 자기 위로와 만족을 하는 사람인 반면, 엔터테이너는 관객과 사랑을 포함한 기타 감정을 교감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예술가와 엔터테이너의 정의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제도와 권위에 저항하는 그의 세계관과 달리, 예술가라는 단어는 제도와 권위, 그리고 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되었다. 게다가, 그는 기존에 형성된 판타지를 파괴한 새로운 음악적 판타지를 이뤘다는 점에서 오로지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만이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칠리 곤잘레스는 자신의 대타를 구하기 위해 오디션을 열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저 독특하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에게 칠리 곤잘레스는 단순한 활동명이 아닌 자아이자 본인이 만든 판타지이므로, 그는 자신의 대타를 구함으로써 대충 매체에 의해 언젠가 또 다른 관습적인 세계관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노력한다.



끝으로 칠리 곤잘레스는 인터뷰 진행자의 '죽음'과 관련된 질문을 듣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대답한다. 이는 자신이 형에게 썼었던 편지 내용과 관련이 있다.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판타지를 이뤘기에, 그는 굳이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아직도 분출해야 할 본인의 생각과 감정이 남아있으므로, 그리고 관습에 맞서는 기이한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있으므로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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