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지 때문이다"
'그레인'을 귀 밑에 이식하면 누구나 기억을 실시간으로 백업해 머릿속과 TV 스크린에서 재생할 수 있다. 30년 전 과거의 일 마저도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는 세상. 아내 '피'보다 늦게 친구의 파티에 도착한 리암은 피와 조너스라는 남자 사이의 친밀함이 불안하다. 기억을 재생해 조너스가 피의 옛 연인이었음을 알아낸 리암. 진실을 향한 리암의 집착은 점차 격해지며 종래에는 모두와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번 에피소드는 기억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 세상에서는 기억이야말로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다 줄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억을 생생하게 복기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레인은 필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억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 리암이 친구의 파티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직전에 이뤄졌던 업무 평가회를 거듭 반복 재생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친구의 파티에서 피와 조너스가 친밀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리암이 집에 돌아와 밤새 그들의 모습을 반복 재생하며 지켜보는 리암의 모습에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의심이 들면 복기하게 되고 복기하면 다시금 의심이 들게 되니 리암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인과관계가 무의미해지는 의심과 복기의 뫼비우스의 띠에 당착한 셈이다. 리암에게 그레인은 기적을 빙자한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복기하는 것은 집착과 의심뿐이다. 그럼으로써 이번 에피소드는 보는 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뫼비우스의 띠에 발을 들이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그 결말이 십중팔구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심이 진실인 것으로 드러나면 예의 배신감이 뒤따라올 수밖에 없고 의심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후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 이전보다 더한 의심과 집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번 에피소드는 그레인이라는 소재가 없어도 억지스럽지 않으리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의심과 집착은 기술의 발전과는 무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레인은 시청각적 재현을 통해 집착과 의심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이전 에피소드들과 견주었을 때 가장 인간적인 에피소드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에 더해 이번 에피소드는 전개 과정에서 특이점도 수반한다. 이런 류의 콘텐츠들은 보통 피가 정말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리암을 정말 사랑했으나 계속되는 집착에 결국 그를 떠난다는 식으로 끝맺음으로써 기술적 진보에 대한 일방적 비난을 퍼붓는 방식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에피소드는 피가 정말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간의 모든 언행이 거짓이었음을 통렬하게 드러낸다. 리암은 바라던 대로 진실을 밝혀냈으나 이제 그의 곁에 그녀가 없다. 이제 리암은 그녀가 없는 집 안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복기한다. 뒤늦게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모습에서 <어바웃 타임>의 체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판도라의 상자가 다시금 떠오른다. 모든 재앙이 상자에서 빠져나간 가운데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웅크린 작디작은 희망(=행복) 하나. 그러나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그럼으로써 이번 에피소드는 다시 한번 보는 이에게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레인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리암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진실을 모른 채 살게 되더라도 결과적으로 행복하다면 괜찮은 걸까?) 나는 니체의 명언을 잠시 빌려 상기의 질문에 답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지 때문이다". 모든 일의 시작에서 피가 불륜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의심을 망각할 것인지, 모든 일의 끝에서 피라는 사람 자체를 망각할 것인지는 여전히 리암의 선택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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