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여러 가지 의미로 미쳤다
제목: 트립 투 스페인(2017 作)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스티브 쿠건(쿠건 役), 롭 브라이든(롭 役)
#1시간 48분 #힐링 #음식 #인생풍경 #케미 폭발 #돈키호테 #<트립 투 이탈리아>, <트립 투 잉글랜드>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트립 투 스페인>은 로드 무비가 서사에 대한 욕심 없이 오로지 풍경과 대화만 담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영국의 시나리오 작가 쿠건과 배우 롭이 일주일 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는 것. 그게 전부다. 쿠건과 롭이 여행을 하는 순간순간이 그 자체의 작은 스토리로 상황 전체를 아우르는 스토리 라인은 없다. 그렇다면 감독이 스토리 대신 영화에 채워 넣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곧, <트립 투 스페인>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드 트립 무비이므로 마냥 자유로운 구성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트립 투 스페인>은 기계적으로 영화적 알고리즘이 투입돼 반복되는 일종의 수식과도 같다. 형식적이고 노골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심플하고 효과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는 영화적 알고리즘이 처음에는 관객들의 몰입을 돕지만 임계점 이후부터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트립 투 스페인>의 영화적 알고리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사실상 <트립 투 스페인>은 쿠건과 롭의 끊임없는 대화로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화의 스펙트럼은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여행지에 대한 역사나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 대화의 메인메뉴는 믹 재거 같은 유명인사들의 성대모사 배틀이다. 간혹, 모르는 배우들의 성대모사가 이어져도 그들의 쓸데없이 진지하고 리얼한 묘사는 폭소를 유발하게 한다. 실제로 롭은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성대모사 연기에 정통한 배우다. 그 세심한 디테인은 괜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트립 투 스페인>은 관객들이 웃는 구간이 일치하고, 많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여느 영화보다 관객들의 호응이 좋은 영화였다. 그만큼 대화에 있어 보편적인 주제를 보편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갔다는 의미다. 또한 이들 대화의 주목할만한 특징은 일상적인 시시콜콜한 것들조차도 컷 하지 않고 담아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 중에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의미 없는 대화들이 두 사람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재현되는 셈이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이방인의 행위다. 타인의 일상이 벌어지는 시공간을 잠시 거쳐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트립 투 스페인>은 여행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꿰뚫는다. 쿠건과 롭의 식사 씬을 구심점으로 여행지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주방에서 분주하게 요리하는 요리사들, 침착한 표정으로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 활기찬 표정을 식사를 하는 다른 손님들의 모습이 순서를 바꿔가며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드러난다.
비단, 식사 씬뿐만이 아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발 딛는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담아내겠다는 듯이 현지인들의 일상을 잠시라도 스크린에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낯선 곳에 있는 낯선 이들의 모습은 마치 내가 여행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본론으로 돌아와, 쿠건과 롭이 음식을 먹으며 티격태격 실없는 대화를 하는 모습과 다양한 현지인들의 모습은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식사 씬에서 교차 연출 빈도가 줄어든 다는 것이다. 마치, 이제는 두 사람이 스페인에 동화된 것처럼.
<트립 투 스페인>은 영상미에 올인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피사체를 사이드에 배치하고 아웃포커싱한 후, 배경에 초점을 맞춰 부각하는 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감탄을 자아내는 웅장한 풍경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도로변이나 잡초로 무성한 들판들도 무시하지 않고 천천히 훑고 지나간다. 풍경 하나하나에 스페인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영상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스크린에서 스페인의 풍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순간, '내 영화가 될 것 같다'는 것을 체감했다.
신기한 건, 풍경이 캐릭터의 감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롭은 다시 영국으로 떠나고, 쿠건만이 글을 쓰기 위해 스페인에 남는다. 쿠건은 파트너를 떠나보내고, 연인에게 거절당해 굉장히 우울한 상태다. 이때도 감독은 스크린은 아름다운 스페인의 전경으로 물들이지만 이전에 경험했던 시각적 황홀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쿠건이 롭과 활기차게 여행을 할 때는 날씨, 색조와 상관없이 경쾌하게 보였던 풍경이 쿠건이 외로워지자 한없이 적막하게만 보인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영화와 영상미를 적절하게 조율할 줄 아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립 투 스페인>은 65% 지점까지만 성공한 영화다. 위에서 설명한 알고리즘은 분명히, 관객들에게 키득거릴 수 있는 소소한 재미와 천천히 황홀한 영상미를 만끽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어느 여행지를 가도 똑같았다. 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동일한 레퍼토리의 대화를 했고, 이 와중에 카메라는 계속해서 현지인들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심지어는 이들이 차를 타고 도로를 가는 씬에서 사용되는 카메라 기법 역시 다 비슷비슷하다.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무대 세트만 계속해서 바뀔 뿐, 같은 인물에 의해 같은 연기가 반복되는 셈이다. 영화에 대한 몰입도와 흥미가 점진적으로 저하되는 것을 느끼며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보는 내내 오랜만에 보는 영화라면 만족했다가도 지루함을 발견하자 나도 모르게 비판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비단 나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옆에 앉은 관객들의 호응도도 현저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서사에 욕심내지 않고 순간순간을 조명했을 때 생기는 장점과 그럼으로써 파생되는 단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트립 투 스페인>은 중의적인 의미에서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미친 듯이 아름다운 영상미. 뇌에서 필터링되지 않고 쏟아지는 미친 개그 코드. 그리고 미친 것 같은 결말.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함구하겠지만 '감독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농락해도 되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이없고 또 미친 결말이다. 결말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다. 요약하자면 <트립 투 스페인>은 결국 미친 영화다. 또,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확실한 영화다. 호불호는 있어도 평가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