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재난 대응

흉년과 전염병 앞에서 조선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by 모두의국사쌤

우리는 재난을 만날 때마다,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은 오늘만의 것이 아닙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도, 매 해 반복되는 흉년과 뜻밖의 전염병 앞에서

나라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했습니다.

농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조선에서

기근은 곧 생존의 문제였고, 전염병은 공동체의 붕괴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선은 이러한 위기 앞에서

상당히 체계적이고 공감 중심의 재난 대응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흉년을 막기 위한 노력, ‘풍흉조사’부터 시작하다

조선은 전국 팔도에서 매년 작황을 조사하는 ‘황정승문’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들은 봄, 여름, 가을마다 농작물의 상태를 조사해

서울로 보고해야 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미리 곡물 이동과 구휼 대책이 준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라도에 풍년이 들고 경상도에 흉년이 들면

전라도의 잉여 곡식을 선박으로 경상도로 이동시켜 굶주림을 막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운반’이라 불렀고, 백성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균형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한 구휼제도, ‘환곡’과 ‘진휼’

조선에는 진휼청이라는 국가 기관이 존재했습니다.

흉년이 나면 진휼청에서 쌀과 보리 등 곡식을 빌려주거나 무상으로 나누는 구조였고,

특히 굶주리는 백성에게는 일시적인 세금 감면이나 노동 면제 조치도 함께 내려졌습니다.


또한, 매년 평상시에도 곡식을 비축해두는 환곡제도가 있었죠.

곡물을 ‘대여’해주고 추수 후 갚게 하는 방식이었지만,

잘 운영된 고을에서는 이 제도가 백성의 생명줄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역마다 운영 방식이 달라

부작용이나 폐단도 생겼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은 백성의 생존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전염병 앞에서의 조선 – 격리와 방역의 시작

조선 후기에는 전염병이 자주 퍼졌습니다.

‘역병(疫病)’이라 불리던 이 질병들은 주로 장티푸스, 천연두, 콜레라 등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이 전염병이 ‘사람 사이에서 전파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자와 시신을 격리하라는 명령이 수차례 등장하고,

심지어 병자들이 많은 마을은 ‘출입 통제’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의녀나 의원들이 지방으로 파견되어 예방 방법을 교육하고 약제를 나누는 일도 있었고,

조선의 대표적 의학서인 『동의보감』이나 『구급방』에는

전염병 치료법과 예방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돌보는 방식에서도 ‘국가의 마음’

재난은 단지 살아남은 사람만을 위한 문제가 아닙니다.

조선은 전염병이나 흉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 무연고로 죽은 이들을 위해

임시 시설을 세우고 공적으로 장례를 치르거나 보호소를 마련하는 일도 시도했습니다.

국가가 백성을 단지 수치나 세금으로 보지 않고,

존엄한 ‘사람’으로 대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지방에서 완벽하게 운영되진 않았지만,

그 시도 자체가 오늘날에도 울림을 줍니다.


오늘, 조선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조선의 재난 대응은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 위기, 팬데믹, 지역 불균형 등의 문제에 대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합니다.

누군가는 조선을 낡은 봉건 국가로 보지만,

그 안에는 ‘백성의 삶을 우선에 두려 했던 정성’과 ‘현장을 읽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정성과 지혜를 다시 꺼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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