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끝에 남은 건

백경 에세이

by 백경
깊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물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은

다음 사랑에 섣불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전 사랑을

새로운 사랑으로 덮기도 하지만.

흔적마저 지우지 못 한다.






초딩 때는 사랑 노래가 싫었다.

세상에 하고 많은 주제가 많은데 한국 음악 시장은 사랑 노래로 가득하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면 사랑 노래만 있다고 봐도 무관하다.


그때에 난 댄스 음악을 좋아했고,

발라드가 나오면 언제 댄스 음악으로 바뀔지 기대했다.

(끝까지 절절한 발라드로 끝나면 크게 실망하고는 했다.)


나이가 들자, 이 모든 것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절절하게 사랑, 사랑하는지를.




난 나무 같은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이름에 나무 목 자가 두 개나 있다.)

이름 이야기는 웃자고 한 소리고.

왜 나무 같은 사람이냐면 어딘가로 이동하기를 싫어한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진득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걸 선호한다.

어쩌면 나무가 아닌 돌멩이나 바위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걸 보면, 바위 같은 사람이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삶은 기질과 다르게 흘러갔다.

난 이동을 많이 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짐 싸기의 달인이 되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짐을 최소한으로 가지면 된다.


아무튼!

그러한 기질은 성격에서도 드러난다.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기보다 한 사람과 진득한 관계를 맺길 좋아한다.


나무 같은 성격에 유목민의 삶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다.

나란 인간은 생존에 참 취약하구나 싶다.


그러다 보니 ‘이별’은 ‘고통’이다.

이별 후 맞는 고통을 싫어해서 대인 관계에 틈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이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직도 난 이별이 힘든 사람이다.






남녀 간의 사랑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사랑이라는 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것이니까.


사랑했던 사람, 좋아했던 사람이 떠난 다음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시절인연도 그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괜스레 가슴 한켠이 몽글몽글 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시절 난 사랑 ‘받는’ 존재였다.

그 사랑이 공기 같아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면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사랑이 그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을 때,

난 병들어버렸다.


그 병의 원인은 언제나 같았다.

내가 선택한 삶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 시작된 레이스는 끝을 봐야 했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난 끝끝내 완주를 했다.

완주할 때의 성취감 덕분에 한동안은 그 완주를 스스로 해냈다 생각했다.


성취감이 가라앉자 본성이 찌꺼기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주는 나를 위한 완주가 아니었다 생각했다.


난 누군가의 트로피가 되기 위해서 끝을 향해 달렸나.

내가 이룬 건 무엇인가.


속이 곪기 시작했다.

난 내 시간을 들여 다른 이의 삶을 살고 있었다.

바보 같게도 달릴 때는 잘못된 줄 알았지만,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병들었다.

난 사춘기 앓이를 한 적 없었다.

그 시절 해야 했던 성장통이 뒤늦게 찾아왔다.


난, 그렇게 나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

심하진 않았지만, 대화를 하고 나면 곧잘 잊곤 하셨다.


잊어가는 그녀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원래는 자주 통화를 했었지만, 그 무렵 난 통화를 하지 않고 끙끙 앓았다.


난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건 친구 덕분이었다.

그가 날 찾아온 날.

난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테이블 위와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으니 챙겨 먹으라는 말만 남긴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시간이고 날 기다리던 그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며칠 뒤 연락이 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경, 너 병원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평소에 장난기 많던 그 친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지체하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 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난 이별이 힘들다.

어쩌면 난 나와 평생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있는 우울감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백경의 길고 긴 터널은 이어서 연재하겠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