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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정김 Nov 30. 2021

[학관] | 판타레이

57년 된 학관을 허물고 새로 짓는다고 한다.

여긴 지금도 참 춥구나. 제법 나들이를 다닐 만큼 기온이 올랐는데도 학관의 온도는 여전하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21년 전에도,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14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캠퍼스 안의 다른 공간들보다 항상 3도쯤은 낮은 공기. 학관 입구에 들어설 때면 갑자기 온기가 비어버린 공간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학관의 냄새는 변함없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문대생도 아니었던 나를, 지금 이 시간에 여기까지 이끌리게 한 건 순전히 이 한결같은 서늘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냄새가 맡고 싶어서.


학관은 인문대생들을 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 처음 가보았던 건 대학에 입학한 지 1년도 지나고서였다. 경영학 전공생이었던 내가 우리과 건물과는 한참 떨어진 곳을 굳이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1년만에 학관에 처음 가게 된 것도 학점을 메우기 위해 꼭 들어야 하는 교양 수업 때문이었다. 학관에서 먼저 수업을 들었던 같은 과 친구들에게 전해 들은 적은 있었다. 낡았다. 학교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대강당 못지않게 구식이다. 화장실이 이상하다. 불편하다. 길을 못 찾겠다. 음산하다. 춥다. 아무튼 거길 가보면 우리 건물이 얼마나 좋은지 안다. 대충 다 이런 이야기들. 아무리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리고 싶은 신입생이라 해도 확실히 애써 가볼 곳은 아니었다. 가벼운 잡담으로 흘려버렸던 같은 과 친구들의 말은 학관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경영관이 최첨단이긴 하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살짝 우쭐해졌던 것 같다.


매점과 자습실을 지나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면 학관의 냄새는 더 강해진다. 몇 번을 덧칠했는지 모를 페인트 벽을 천천히 짚어가며 구식 고무 바닥재가 깔린 복도를 걸으면 109호가 나온다. 학관에서 첫 수업을 들었던 그 강의실. 109호 앞문 손잡이를 돌리자 20여 년의 시간 동안 한층 더 엇나간 문이 소음을 내며 열린다. 순전히 기분 탓일지 아니면 내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몇 가지 기계들이나 아주 조금 더 편해진 책걸상을 제외하면 강의실의 모습도 여전하다. 소극장처럼 계단식으로 배열된 책상 중 열 번째 줄 어딘가, 아마 저쯤에서 조별 과제를 했던 것 같다. 인문대생 2명에 경영학과인 나, 또 다른 타과생들 2명, 이렇게 총 5명으로 이루어진 조였다. 당시 막 2000년대에 들어서며 21세기니 밀레니엄이니 신인류니 하는 단어들이 트렌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무늬를 그려간다던 인문학 교양 수업답게 강의 제목은 ‘밀레니엄 시대의 문화와 패러다임'이었다. 조별 과제는 21세기적 창의성을 가지고 새로운 활동이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해오는 거였다.


우리 조는 인문대 조원 중 하나의 추천으로 18살에 과학고를 조기 졸업해 S대 공과대에 진학했다가 자퇴를 한 후 유명 밴드 드러머를 거쳐 사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인물을 인터뷰하기로 했다. 그는 주로 자연의 소리를 모아 새로운 사운드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자연 속 날 것의 소리를 수집하는 사운드 아티스트라는 말이 새로운 패러다임인지 저 사람의 엄청난 이력과 대비되는 반전의 행보가 새로운 패러다임인지는 도통 모르겠었지만, 뭐가 되었든 진짜 21세기 사람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서야 말하지만 난 사운드 아티스트라는 말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제가 21세기에 맞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정작 사운드 아티스트라 불리던 그 사람은 이런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대학교 2학년치고는 만나기 어려운 제법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인터뷰는 저 한 줄로만 기억된다. 몇 해 전 유행하기 시작한 동영상 SNS에서 그가 국내 ASMR 콘텐츠의 시조새 같은 존재로 활동 중인 걸 알게 됐을 때도 불현듯 저 첫마디가 생각났다. 그는 ASMR에서도 자연의 소리나 아날로그 소리를 컨셉으로 활동 중이었다. 확실히 21세기에 맞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사운드 아티스트였고 이제는 10대, 20대에게 가장 인기 좋은 SNS에서 ASMR 방송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ASMR이라는 말을 그때 또 처음 알게 됐다.

어쨌거나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진 나머지 인터뷰를 대신해 기억의 공백을 메운 건 그를 만나러 가던 길에 들었던 인문대생 둘의 대화다.


“너 이 사람 어떻게 알았어?”

“학교 앞에서 가져온 잡지에서 봤어. 대학 생활 같은 거 다루는 잡진데 후문 쪽에 가면 매일 있어. 공짜로 그냥 집어 오면 돼.”

“후문 쪽에 딱히 갈 일이 있으려나.”

“나는 새천년관에서 듣는 교양 수업 때문에 갔거든? 근데 새천년관 진.짜. 좋아.”


맞아. 좋지. 거기도 우리 건물만큼 좋지.


“A기업이 후원한 거래. 그래서 새천년A관이잖아. 건물도 완전 회사 빌딩처럼 생기고, 교실 기계도 다 완전 최신이고, 화장실 들어가면 자동으로 불도 켜지고 꺼지고, 방향제도 자동으로 나오는지 화장실에서 향기가 나는 거야.”

“우리 학교에 그런 건물도 있어?”

“우리 학교에 그런 건물도 있는 게 아니라 최근에 지은 것들은 다 그런 것 같던데.”


쟨 진짜 학관밖에 안 가봤나.


“나도 다음 학기에는 거기서 하는 수업 하나 들어봐야겠다.”

“근데 그래도 난 학관이 좋긴 좋은 것 같아.”

“어어. 그건 나도 그래. 말만 이러고 학관에서 안 벗어 날지도.”

“시설만 생각하면 엄청 불편하지만 인간적인 맛이 있지.”


그렇다고?


“춥고 오래되고 낡고 불편한데 이상하게 편하지?”

“응. 건물 구조도 진짜 이상해.”

“분명 1층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나오니까 막 3층이고 이래도 편하긴 편하지.”

“학관은 학관이지.”

“그니까. 학관은 학관이지 뭐.”


그들 대화 속의 학관은 뭐랄까. 어릴 때 가던 시골. 딱 그런 느낌이었을까.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슈퍼를 가려면 차를 타고 10분은 나가야 해서 불량식품을 사 먹을 수 없고, 컴퓨터는 당연히 없고, 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2시간에 한 대씩 와서 PC방은 꿈도 못 꾸고, TV는 공영방송밖에 안 나오고, 겨울엔 6시만 되어도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밖이 깜깜하고. 친구들은 누구 시골이 더 시골인지 배틀을 하듯 불편한 것들에 대해 나열했지만 방학이 되면 또다시 시골로 갔다. 친가도 외가도 모두 서울과 대전이었던 나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댁은 절대 영원히 가질 수 없었지만 학관은 달랐다. 인문대 건물이긴 해도 어쨌거나 결국 우리 학교니까.


나는 4학기가 되던 해에 인문대 소속 전공 중 국문과로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아예 전과를 하기엔 그간 채운 경영학 학점이 아깝기도 했고, 단지 학관 하나 때문에 전과를 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사실 국문학보다는 철학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유난했다. 이런 시대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는 말에, 나는 21세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오늘이야말로 철학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대라 말했던가. 결국 나는 부모님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부모님은 나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국문과가 우리의 타협점이었다. 이제 와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어쩌면 부모님은 핑계였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철학보다는 국문학이나 영문학이 취업에 도움이 될테니까. 졸업 후 마케팅이나 홍보 쪽 일을 하려면 글쓰기 실력도 꽤나 중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늘 최소한의 쓸모 정도는 떠올리는. 오로지 영어로만 진행되는 영문과 수업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복수전공으로 국문과를 택했고, 졸업할 때까지 매학기 2과목 이상은 꼭 학관 수업을 들었다.


109호를 나와 경사진 복도를 조금 더 오르면 전설의 학관 화장실이 나온다. 한쪽 문은 1층으로, 반대쪽 문은 3층으로 연결되는 문제의 화장실. 수업 전이나 수업 중에 급하게 화장실에 들른 신입생들은 1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1층으로 연결되는 출구 때문에 다들 한 번씩은 길을 잃은 채 헤매곤 했다. 왜 이렇게 지은 거냐는 말이 많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지형이 가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설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좌석이 계단식으로 배열된 소극장 형태의 109호처럼 1층의 강의실들은 모두 오르막으로 뻗은 지형에 맞춰져 있다. 노천극장 형태의 강의실들을 지나 1층 복도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바로 그 문제의 화장실이 등장한다. 화장실이 복도보다 살짝 더 높은 지대에 있어서 화장실에 들어서려면 반 층 정도의 애매한 계단 몇 개를 올라야 한다. 복도처럼 펼쳐진 화장실 반대편 끝에는 또 다른 출입구가 있는데 그 문을 나서면 갑자기 301호가 등장하는 어리둥절한 구조다. 그렇다고 2층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2층으로 가기 위해선 1층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있는 2층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1층 복도를 따라 끝까지 와버리면 2층 없이 바로 3층이 나타나는 거다.


한쪽은 1층에서 2층으로, 한쪽은 1층에서 3층으로 연결되는 학관은 오늘 다시금 걸어보아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지금 같았으면 오르막길 쪽 경사로를 속 시원하게 파내고 1층부터 가지런히 쌓아올리지 않았을까. 그럼 강의실도 더 많이 만들 수 있어 경제적이고 동선도 헷갈릴 일 없어 효율적이겠지. 하지만 오르막길을 그대로 살린 덕분에 학관 옆에는 건물을 따라 나란히 오르는 작은 잔디 동산도 있다. 동산의 완만한 대각선을 따라 교실의 창도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졌다. 학관의 창 밖은 늘 꽤나 감성적이었다. 그래서 학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다 창 밖을 보면 그렇게 땡땡이가 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학관은 저 이상한 화장실 구조 때문에라도 유명했다. 내가 졸업할 즈음 캠퍼스에는 새로운 상업 단지가 들어설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건물 설계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독일의 유명 건축가는 굳이 학관을 찾아가 공간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갔다. 특히 오르막 지형 위에서 1층과 3층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화장실을 통로처럼 활용한 구조를 보고서는 경탄을 하며 돌아갔다는 말이 루머처럼 퍼졌다. 루머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진짜라면 그 경탄의 의미가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루머는 진짜이며 그것은 긍정의 의미라고 믿었다.


학관은 그런 곳이었다. 오늘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지만 한 때는 모두 말이 되었던 것들. 사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들. 언젠가 더 지나고 나면 그 말이 맞았구나 하게 될지도 모를 것들. 정리되지 않은 오랜 시간이 덕지덕지 묻어 불편해 보이지만 어느 곳보다 마음 편하게 누릴 수 있었던, 한결같이 추운 공기가 따뜻했던, 세월이 만들어 낸 이상한 자부심이 깃든 그런 곳이었다. 학관은 언제고 늘 학관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반차까지 내고서 이곳을 찾아온 것일 거다.


화장실을 통과해 3층으로 들어서 복도 끝까지 걸어가니 창 밖으로 B관 건물이 보인다. 생각해보니 학관에서 이렇게 B관을 바라본 건 처음이었던가. 졸업을 한 해 앞둔 때부터 짓기 시작했던 이 건물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B기업에 들어간 지 3년째에 완공되었다. 새천년A관처럼 우리 회사의 후원으로 지어져 B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B관이 완공되던 해 홍보마케팅팀 소속 3년 차 사원이었던 나는 이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완공 행사를 준비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다. 김 선배와 가까워진 건 이때부터였다. 같은 팀에 3년 먼저 입사한 김 선배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 알게 된 사이였지만 같은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대화를 많이 나누어 본 것도 아닌데 입사 초부터 김 선배에게는 마음속 친밀감 같은 게 느껴졌다. 같은 학교 출신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김 선배의 전공이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공부해서 뭘 해먹고 살거냐며 부모님이 그렇게나 반대했던 그 철학과를 김 선배는 졸업했고, 동시에 대기업 홍보팀에 들어와 그 어느 과를 졸업한 다른 사람보다 일 잘하는 에이스 직원으로 통했다. 대학 시절부터 김 선배를 알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철학과를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이것 보라고. 철학과엔 이런 21세기형 인재도 있지 않냐고.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구식 철학이랑 요즘 철학은 전혀 다른 거라고” 부모님 앞에 김 선배를 데려가 설득했을 것이다.


김 선배는 B관 완공 기념행사의 실무를 총괄했다. 행사 준비를 위한 사전 답사를 위해 함께 처음으로 학교를 방문했던 길에 용기 내어 김 선배에게 꺼낸 말은 “선배, 저도 학관 좋아해요"였다. 김 선배는 잠시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원하게 웃으며 “나도"라고 대답했다. 이후로 행사 날까지 이런저런 회의와 준비를 위해 김 선배와 몇 번이나 함께 학교를 방문했고, 오가는 길에 근처 오래된 맛집이나 새로 생긴 가게에 들러 술도 자주 했다. 그때 김 선배와 같이 학관도 들렀던가.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새천년A관보다도 경영관보다도 훨씬 더 요즘 기술로 무장한 우리 회사 B관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 생각해내느라 너무 바빴다. 완공식 당일에는 김 선배의 아이디어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다던 철학자를 초청해 특강을 열었다. 주제는 ‘21세기 미래형 리더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문학’이었다. B관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미래지향적인 회사 비전을 드러내면서도 수천 년 인류사의 근원적 뿌리를 담은, 이거야말로 완벽히 요즘 철학이 아닌가. 진지하지만 고루하지 않고 트렌디하지만 가볍지 않은 그 특강을 함께 준비하며 ‘역시 김 선배’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던 것 같다. 과연 오래된 인문학만큼이나 혁신적인 주제는 없었다. 특강이 시작되기 20분 전부터 강의실은 이미 만석이었다. 그럼에도 복도까지 길게 줄을 선 채 입장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을 보니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릴 적 친구들의 시골도, 인문대 학생들의 학관도,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김 선배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정말 21세기형 인재였다. 500페이지도 넘는 어려운 고전부터 국내외 유수의 석학들이 쓴 경영서까지 독파하고 지난주 화제가 된 TV 예능이나 유행어에도 밝았으며 옷까지 잘 입었다. 나는 김 선배가 입은 옷 스타일을 몰래 익혀두었다가 친구들과의 만남에 비슷하게 따라 입고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꼭 김 선배와 비슷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개인적인 일이든 회사 일이든 고민이 생길 때도 대부분 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 언젠가는 술이 조금 취해 일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는 한탄 섞인 질문을 던졌다. 김 선배 역시 술이 조금 취한 채로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허세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판타레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양했지만, 후배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냥 한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그건 김 선배의 책상에도 붙어 있는 말이자 선배가 회사에 들어올 때 자기소개서에도 썼던 말이기도 했다.


“만물은 흐른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오직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 뿐.”


김 선배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가 한 말이라고 덧붙였다. 더 유명하고 인정받고 요즘에 인기 있는 철학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는 저 말이 도통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조금 알았다 생각할 때쯤 다 변해버리니 또다시 배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겠냐고.


“계속 배워야지 뭐.”


나와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쩌겠냐는 듯 웃어 보이던 김 선배의 모습이 참 좋았다. 그전에도 좋았지만 그날은 조금 더 좋았고 한참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김 선배와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 건 몇 년 후 회사의 사업 확장과 함께 우리가 함께 있던 홍보마케팅팀이 커뮤니케이션팀과 마케팅팀으로 분리되면서부터였다. 선배는 커뮤니케이션팀, 나는 마케팅팀으로 들어가고 더 나중에는 부서가 위치한 층까지 달라지면서 붙어 다니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었다. 퇴근 후 밤 시간이나 주말에 따로 만나 밥을 먹거나 수다를 떠는 일도 있었지만, 내가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마저도 뜸해졌다. 결혼 후에는 아주 가끔 점심을 같이 했고, 또다시 몇 년 후 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위해 휴직을 하는 동안에는 더더욱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김 선배라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오랜 시간 회사를 떠나 있다 복귀하던 날에도 영문 모를 두려움과 압박으로부터 위로가 되었던 것 또한 김 선배였다. 책상 위에는 김 선배가 준비한 자그마한 화분과 함께 메모가 놓여있었다.


‘모든 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변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시 화이팅!’


3층으로 연결된 입구로 학관을 나와 야외 통로 계단을 따라 B관으로 들어섰다. B관이 완공되던 해 선배와 함께 인문학 특강 행사를 열었던 강의실이 보인다. 어쩐 일인지 그 시절 학관의 109호와 오늘의 109호보다 이 강의실에서 세월의 흔적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유행이라는 건, 최첨단이라는 건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에 너무 기민하게 반응하는 만큼 시간의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들. 그래서 아무리 변하고 변해도, 다시는 유행이고 최첨단이 될 수 없을 운명에 놓인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에 복귀하는 동안 김 선배는 변함없이 회사를 지켰다. 독신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하지 않은 김 선배의 모습은 B관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그때나, 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나, 그리고 지금에나 늘 꼭 같아 보였다. 비단 외형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김 선배는 마치 탄성이 없는 기체 같았다. 본인의 신념대로 계속 변해야 하는 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듯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했다. 동시에, 변한다는 그 성질이 늘 한결같아서 언제나 똑같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김 선배는 동기들보다 빠른 진급을 거쳐, 여자 직원 중에서는 드물게 이른 나이로 부장에 진급하고, 최근에는 특진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후배들과도 사이가 좋아 어린 직원들의 워너비 같은 존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한결같은 김 선배의 모습이었다. 김 선배는 세상의 모든 변화에 최적의 리듬을 타고 흘러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함께 변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김 선배로부터 느닷없는 메시지가 온 게 그제 아침이었다.


‘나 퇴사해’


메시지를 보자마자 왜 그 사건이 떠올랐을까. 이 회사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절대로 가장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분명 김 선배였다. 어쩌면 퇴사라는 단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 선배는 그 일만큼이나 퇴사와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지난주 회사가 한바탕 난리가 났던 건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익명의 제보 때문이었다. 커뮤니케이션팀 소속 2년 차 사원이라고 밝힌 사람은 점심시간 후 회사 화장실에서 한 상사로부터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양치를 하고 있던 상사가 이물질과 거품이 그득 묻어있는 칫솔을 입에서 빼 자신의 얼굴로 냅다 던졌다는 거였다.


‘이게 사내 폭력이 아니면 뭔가요?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공공장소에서 부하 직원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정상인가요? 사과하려는지 계속 전화하는데 이 정도로 받아줄 마음 전혀 없으니 그만하시기 바랍니다. 회사에서 워낙 유명하고 파워있는 분이라 이대로 사과받으면 저만 피해 본 채 아무 일 없이 넘어갈까봐 글 남깁니다. 일을 얼마나 잘하시는진 모르겠지만 그전에 인성부터 제대로 갖추세요.’


피해자는 수치스러움에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겨 현재 휴직을 한 채 정신과 진료를 다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커뮤니케이션팀이면 김 선배의 팀일텐데 일 무마하느라 김 선배도 참 정신없겠다고 생각했다. 선배한테 사내 게시판 이야기는 무슨 일이냐고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다 그만두고 말았다. 어련히 잘 해결하겠지. 글이 올라오고 하루 이틀간은 회사 어디를 가도 저 상사가 대체 누구인지에 대한 온갖 추측과 욕이 가득했다. 어쩐 일인지 김 선배의 이름이 몇 번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김 선배라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그러다 사건이 반전의 물살을 탄 건 글 밑에 달린 또 다른 익명의 댓글 때문이었다.


‘두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 댓글을 적을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지금 제삼자의 의견이 가장 필요한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적어봅니다. 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화장실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구요, 이야기 속 부장님이 칫솔을 던진 건 사실이고 저 역시 그건 정말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글쓴이가 분명 선을 넘은 것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화장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건이 터질 때까지 그곳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만한 큰 목소리로 특정 인물에 대해 공개적인 험담을 하고, 옆에 있던 부장님께 함께 욕을 해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었죠. 칫솔을 던진 건 폭력이 맞고 분명 잘못한 일입니다. 제가 폭력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부장님의 입장이 이해 가기도 해서요. 회사 내 권력 구조를 이용해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가 발생한 것처럼 와전된 것 같아 목격자 입장에서 몇 자 적어봅니다.’


이 댓글 하나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상사와 부하 직원 편으로 나뉘어 토론이 일기 시작했다. 상사 욕 좀 할 수 있지 그게 대수냐, 상사 욕 한 번 안 하고 산 사람이 어디 있느냐부터 상황이 오죽 심각했으면 칫솔을 던졌겠냐까지. 하지만 댓글의 내용에서 나의 시선을 끈 건 단 하나, ‘부장'이라는 단어였다. 커뮤니케이션 팀에 부장은 김 선배를 포함해 총 4명이었다. 그 중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 입에 오른 적 있던 사람은 김 선배와 박 부장님 둘 뿐이었다. 정말 혹시라도 그게 김 선배는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퇴사한다는 김 선배의 메시지를 받은 거였다.


그날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건 커뮤니케이션 팀에 있던 입사 동기로부터였다. 글을 쓴 사원 최는 사실 김 선배가 아니라 박 부장님과 잦은 트러블이 있던 상태였다고 했다.


“우리 때야 회사에서 뭐라 해도 크게 불평불만 못 드러냈어도 요즘 애들은 또 다르지. 걔네가 그러는 게 틀렸다고도 할 수 없고. 박 부장님이 워낙에 꼰대 캐릭터로 유명하잖아. 퇴근하고나서 전화하는 건 부지기수고. 한 날은 최가 연차 쓴 날에 전화를 했나 봐. 제출했던 문서 못찾겠으니까 메일로 다시 보내달라고. 근데 최 입장에서는 이게 꼭 오늘 필요한 서류로 보이지도 않고, 따지면 박 부장님이 잘못한 건데 미안한 기색도 없이 업무 지시하듯 하니까 열받는 거야. 밖에 나가 있던 상태라 집에 가서 보내준다고 했더니 무조건 지금 바로 빨리 보내라고 했다나 뭐라나. 당연히 열받지. 나는 뭐 더 심하게도 당했는데. 근데 그것 말고도 평소에 박 부장님이 말 험하게 하는 거나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밑에 애들 사이에서 쌓인 게 많았거든. 알잖아. 박 부장님 커뮤케이션 스타일. 까라면 까 하는 거. 근데 우리가 볼 땐 박 부장님도 옛날 박 부장님 보다는 훨씬 좋아지긴 했단 말이야. 그렇다고 애들이 그걸 뭐 알겠냐. 우리가 박 부장님 역사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이상한 거고.”


그 사이에서 둘의 역할을 조율해보려고 한 게 김 선배였다. 최는 원래 김 선배가 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1팀으로 들어갔다가 올 초 박 부장님이 있는 3팀으로 옮기게 됐다.


“안 좋은 소리는 하도 계속 들리고, 최는 최대로 하소연하고, 박 부장님은 또 저대로 그러니까 김 선배도 중간에서 힘들었나 봐. 그러다가 생각한 게 SNS였던 거야. 사실 김 선배랑 나는 최랑 SNS 친구거든. 우리가 먼저 팔로잉한 것도 아니고 최가 먼저 했어. 사진 올리면 댓글도 달아주고 거기서 나온 화제로 개인 메시지를 하기도 했고. 그래서 김 선배랑 나는 그게 나름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나랑 김 선배랑 박 부장님이랑 셋이 커피 마시다가 김 선배가 박 부장님한테 결국 한소리 하더라고. ‘박부장님 입장에서야 둘이 마찰 있는 거지 딴 사람들 눈에는 최한테 일방적으로 꼰대질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고작 몇 년 후배인 나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애들은 어떻겠냐, 세대 갈등은 대개 기존 걸 못 따르는 애들 문제가 아니라 기존 걸 못 버리는 어른들 문제라고 하더라, 연륜은 조언이 아니라 이해하는데 쓰는 거다, 제발 뭐든 배우든 노력이라도 좀 해봐라.’ 한 마디 한 마디 진짜 감동적이지 않냐. 박 부장님도 김 선배 말은 그래도 듣더라고. 그러고 우리가 일러준 게 SNS였어. 박 부장님이 최 SNS를 팔로잉한 거고. 우리가 완전 잘못 생각한 거지 뭐.”


최는 거기서 질겁을 한 거였다. 박 부장님은 그 김에 탄력을 받아 최 이외에 다른 직원들 몇몇을 더 팔로잉하고 댓글도 달았던 모양이었다. 팔로잉한 수만큼 박 부장님과 직원들 사이가 더 악화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날도 최가 화장실에서 다른 직원과 박부장님 욕을 한창 하고 있던 중에 김 선배가 들어선 거였다. 칫솔을 꺼내 치약을 짜고 이를 한창 닦을 때까지도 최는 김 선배를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을 계속 이어갔다고 했다.


“걔도 참 정신머리가 없는 건지 대체 얼마나 당당한 건지. 김 선배 발견했으면 민망한 척이라도 했어야지. 김 선배 보고서는 일러바치듯 더 이야길 했나 봐. 김 선배가 아무리 쿨해도 그건 아니지 않냐. 세상에 박 부장님한테 우리들 SNS 다 팔로잉 당했다, 진짜 소름이다, SNS 할 거면 조용히나 하시지 젊어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다, 박부장님은 저번에 보니 키오스크도 잘 못쓰시던데 SNS 하실 시간에 키오스크나 좀 더 연습하는 게 낫지 않나, 김 부장님은 그러실 일도 없겠지만 절대 박 부장님처럼 변하면 안 된다, 그런 말 하다가 마지막엔  김 부장님이 박 부장님 계정으로 몰래 저희 언팔 좀 해주시면 안 되냐 하는데서... 김 선배도 뭐 그렇게 됐다나 봐."


김 선배가 정말 거품이 가득 묻힌, 식사 후 이 사이사이 음식물 찌꺼기를 골라 빼던 그 칫솔을 최의 얼굴로 던져버렸던 거다.


“김 선배도 당황스럽지. 박 부장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좀 억울하기도 하지 않아? SNS 팔로잉은 왜 자기네들이 하는 건 괜찮고 우리가 하면 꼰대야? 누군 회사 후배랑 SNS 맞팔하는 거 편하나. 나도 뭔 말 나오기 전에 애들이랑 SNS 다 끊을까 봐. 사내 게시판은 계속 난리 난 상태이긴 한데 사실 우리 쪽에서는 얼추 다 해결됐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봐. 목격자라는 사람들 중에서 김 선배 편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김 선배가 최 집까지 찾아가서 사과도 했대. 최도 사과 받고 넘어가는걸로 마무리됐는데 이제는 김 선배가 퇴사하겠다네. 아래고 위고 다 붙잡았는데 소용도 없고... 아무리 요즘 애들이라고 해도 최 걔는 애가 왜 그렇나 싶다가 사실 박 부장님이 제일 문제다 싶다가 또 불쌍하기도 하고. 아 몰라. 우리 팀에서 이런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았냐.”


김 선배는 퇴사 통보 후 연차를 내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동기에게 들은 내용은 모른 척한 채 평소처럼 김 선배와 약속을 잡았다. 퇴근 후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레스토랑 겸 카페로 가자 김 선배는 언제부터 나와 있던 건지 이미 차 한 잔을 다 비운 채였다. 내가 좋아하는 김 선배. 세상의 모든 변화에 최적의 리듬을 타고 이곳까지 도착한 사람. 끊임없이 함께 변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김 선배가 앉아 있었다.


“선배는 진짜 오늘도 여전하네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다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나서야 김 선배가 먼저 운을 뗐다.


“너도 이야기 들었지? 내가 칫솔까지 던져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참 웃기지만 걔 내가 예뻐하던 애거든. 싫은 건 이래서 싫다, 좋은 건 이래서 좋다 확실하게 말하고, 자기 할 일 잘하고. 요즘 애들이다 뭐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사실 합리적인 애들이지.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자기 몫 다하고. 굳이 저렇게까지 선 긋는 게 더 귀찮지 않나 싶을 때도 있는데 우리가 신입일 때 지금 같은 분위기였으면 나도 일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부럽기도 했어. 근데 우리랑 정말 달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때 우리랑 똑같기도 한 거야. 그렇잖아 사실.”


맞장구를 치기도, 위로를 하기도 애매해 가만히 미소만 지은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떤 말을 해야 김 선배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이야길 이어갈 수 있을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다면 김 선배는 무슨 말을 해줬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려운 적막을 깨준 건 또다시 김 선배였다.


“나이가 들면 화를 더 잘 참아야 되는데 난 왜 이렇게 반대로 가는지 몰라. 근데 나 그 짧은 순간 진짜 온갖 생각을 하다가 고른 게 칫솔이었다? 치약은 너무 무거워서 아플 것 같고, 물을 뿌리면 기분이 더 나쁠 것 같은 거야. 그래도 칫솔이 제일 가벼우니까.”


“선배 퇴사는…”


“퇴사하는 건 꼭 이번 일 때문은 아니야. 나는 변하려고 노력했던 걸까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걸까 문득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이번엔 진짜 변해 보려고. 너는 그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참 많이 변했다. 좋아 보여.”


김 선배는 일단 친한 친구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 1년 살기를 해 볼 계획이라고 했다.


“시골살이도 유행인가? 그래도 귀농은 옛날부터 많이 하던 거니까 요즘 애들 따라 하고 그런 거 아니다!”


술에 취해 청춘 영화 같은 대사를 읊던 그 시절의 얼굴처럼,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그 표정으로 어쩌겠냐는 듯 그날도 웃어 보였다.


선배와의 저녁을 마치고 나는 무리해서 오전 반차를 냈다. 얼마 전 학관이 리모델링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 번은 들러야지 생각만 했는데 어쩐지 그날이 꼭 오늘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결같은 학관의 서늘한 공기를 맡으러 회사가 아닌 이곳으로 왔다.


B관을 빠져나와 나무 앞에 잠시 앉아서는 다시 학관 쪽을 바라본다. 언덕을 따라 비스듬하게 세워진 오래된 건물은 그 시절만큼 낯이 익고 오늘처럼 낯설다. 이 중 어느 부분이 버려지고 어느 부분이 남을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단지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게 정말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면 우리 모두는 어쩜 평생 서툰 사람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나도 김 선배도 한 부장님도 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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