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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Oct 30. 2022

Day 5. 베를린 말라가

20200108 Berlin Malaga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아침. 오늘도 아침 일과는 변함이 없다. 간단한 식사와 놀이방에서의 놀이 시간. 아이들은 이 놀이방이 참 맘에 드나 보다. 아직은 시차 적응이 완벽하지 못해 일찍 일어나게 되는데, 숙소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에 아이와 방문하는 누군가에게, 더 고급 호텔에 꼭 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이 숙소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 가족 수준에서는 정말 만족스러운 장소이다.

                                                         

마지막 놀이방에서의 놀이 시간 (2020.1. 독일 베를린)


이제 이 도시에서 반나절의 시간이 남아있다. 우린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기로 했다. 오래전 무너진 장벽의 파편은 베를린 전역 곳곳에 남아있다. 2014년에는 Ostbahnhof 근처에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에 방문했었다.

다시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빠듯할 것만 같았다. 결국, 우리는 중앙역에서 멀지 않은 Bernauer Straße 방면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서둘러 체크아웃할 짐 정리와 채비를 마치고, 숙소 로비에 짐을 맡겼다. 그리고 큰길로 나와 트램을 타고 바로 이동. 도착 후 세온이는 귀찮은지 유모차에서 내리길 거부한다. 마지못해 세현이만 내려 사진을 몇 장 남길 수 있었다.

베를린에 오면 왜 굳이 이미 유물이 되어버린 장벽 일부를 꼭 보려고 오게 되는 것일까. 2014년, 남겨진 벽에 그려진 익살스러운 낙서와 그림을 보며, 우리 남과 북도 언젠간 웃으며 그 삶과 죽음의 구분 선을 두고 농담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로부터 6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대는 바뀌었고, 때때로 정말 무언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한반도를 관통하는 그 물리적, 심리적 장벽은 여전히 삶과 죽음을 가르는 구분 선으로 굳게 자리하고 있다. 사실 한반도 분단 문제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보태기엔 내 식견이 너무나 부족하고, 오늘 정세는 여전히 냉혹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지금 이곳에 함께 온 내 아이들 시대에 그 장벽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게 될까?


Bernauer Straße 인근에 남아 있는 장벽의 일부 (2020.1. 독일 베를린)

                                                   

베를린에서의 짧은 일정 목표를 완수했다. 지난번에도 그렇지만 너무 짧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또 멀리 스페인까지 가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말라가행 비행기는 오후 2시 30분. 점심을 먹기 위해 부지런히 베를린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중앙역에 있는 많은 식당 가운데 어디를 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구글 지도를 열고 중앙역 인근의 평점 좋은 식당을 검색하던 중 HANS IM GLÜCK이란 햄버거 식당을 발견했다. 평점과 몇몇 후기, 올라온 사진을 보고선 별다른 고민 없이 점심 메뉴를 정했다. 그리고 이곳이 비건을 위한 식당이라는 사실은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받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아직까진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해  적이 없다. 맛있는 고기를 좋아하고, 치킨이 좋다. 매 끼니 달걀 요리를 즐긴다. 앞으로도  필요성을 느끼게 되더라도,   있을지 자신은 없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가 완성되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버거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맛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걱정했지만 아이들도 너무나  먹는다. 버거와 감자튀김 맛을 음미하면서 아내에게 이런 맛있는 음식이라면 채식을 충분히  수도 있겠다며 허풍을 조금 떨어본다. 그만큼  식당의 버거는 아주 괜찮은 맛이다. 무엇보다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좋다. 아무리 그래도 살이   수는 없겠지?      

                                                   

처음 가 본 채식 버거 맛집 HANS IM GLÜCK (2020.1. 독일 베를린)
무엇이든 맛있게 먹는 아이들, 잘 먹어서 고마워 (2020.1. 독일 베를린)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복귀. 로비에 맡겨 놓은 짐을 찾고 곧바로 베를린 테겔 공항(Flughafen Berlin-Tegel)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한다. 숙소에서 정류장이 멀진 않지만, 짐을 다 끌고 이동하는 일은 역시 고되다.

베를린 테겔 공항엔 처음이다. 베를린으로 들어올 땐 도심 남쪽에 있는 쇠네펠트 공항(Flughafen Berlin-Schönefeld)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테겔 공항은 도심 북서 방향에 자리 잡고 있다. 오고 갈 때 다른 공항을 이용한다는 것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유럽에서 저가 항공을 타려다 보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쇠네펠트와 비교해 테겔 공항은 훨씬 시내에서 가까워 다행이었다.

무사히 공항에 도착. 베를린 테겔 공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리고 유럽을 호령하는 독일 수도의 공항이라고 하기엔, 흡사 임시 건물 같은 느낌이어서 조금 놀라긴 했다. 물론, 이후 구글에서 사진을 찾아보니 우리가 갔던 터미널이 유독 그런 느낌이긴 했다.

우리가 저가 항공을 이용해서 그런 걸까? 아시아 지역의 LCC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럽에서도 저가 항공을 이용하다 보면 늘 그런 소외감(?)을 조금 느끼게 된다. 공항 터미널, 탑승구 배정과 이용에 있어 늘 뒷전인 것만 같은. 하지만 뭐, 공항이야 조금 허름하면 어떻겠는가. 이 가격에, 안전하게, 그리고 제시간에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다.                

                                          

테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탑승하러 가는 길  (2020.1. 독일 베를린)


공항에서의 짧은 대기 시간을 마치고 우리는 무사히 탑승을 완료했다. 저가 항공을 이용하게 되면, 공항 터미널 배정의 소외감보다 더 큰 걱정은 사실 연착에 대한 부분이긴 하다. 인터넷 카페 등을 찾아보면 연착에 관한 수많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나와 아내도 비행기에 올라타서 한 시간을 대기했던 적도 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연착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부다페스트에서 베를린으로 올 때, 그리고 오늘도 연착은 없다. 정말 다행이다.

말라가까지 비행시간은 약 3시간 30분.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나와 아내도 눈을 붙이니 어느새 스페인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를 말라가까지 데려다 줄 라이언에어의 항공기 (2020.1. 독일 베를린)
말라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탄 버스 (2020.1. 스페인 말라가)


비행시간이 짧지 않아 푹 자고 일어났는지 아이들도 피로가 조금은 풀린 느낌이다. 활주로에서 터미널까지 데려다 줄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안에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앉을자리는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섰는데, 어떤 젊은 유럽 커플이 흔쾌히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누군가의 이런 호의를 마주하게 되면, 그 고마움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영어로 뭐라고 조금 감사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 커플의 영어를 알아듣기가 어려워 소통이 쉽진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감사함을 표하고, 그들 덕분에 기분 좋게 터미널까지 갈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유럽에서 지내는 중 인종차별을 당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실제 오늘 유럽 전역에서 그런 차별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동양인이 힘든 상황에 부닥치기도 할 것이다. 나와 아내는, 아직은 그런 경험은 없었다. 우리가 눈치가 없어서, 아니면 소통이 안 돼서 당한 차별도 인지하지 못한 것일지. 아니면 운 좋게도 아직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은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우리는 많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은 경험만 남아있다. (물론 소매치기의 위험에 노출되었던 경험은 있다.)

아이들과 유럽을 다니며, 사실 그러한 차별과 위험에 대한 우려는 우리 안에 늘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버스 커플의 양보가 더 반갑고 고마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호의처럼, 우리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선뜻 그런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려본다.

물론 나에게도 나와 모습이 다른 낯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결국, 그러한 차별이 없어지려면 내 안에 있는 낯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부터 해소하는 게 우선이겠지.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리고 나와 다른 누군가와 부대끼며 오늘을 살아가야만 하는 어느 누군가에게도.

참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다. 나와 다른 누군가가, 결국은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시대엔 굳이 용기 내지 않아도, 더 공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우리 아이들이 그런 이들로 자라나길 소망한다.

                                                    

해 질 무렵 말라가 공항의 풍경 (2020.1. 스페인 말라가)


수화물을 찾으면서 택시를 호출했다. 어린아이들과 여행을 하면서 점점 택시 이용이 잦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몸이 편하긴 하지만, 사실 버스나 전철, 트램 등 현지 로컬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나름의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자연스럽게 택시보다는 다른 수단을 이용하게 되겠지.

어디에서 호출한 택시를 만나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다행히도 센스 있는 기사가 우리가 있는 곳까지 와 주었다. 공항에서 말라가 시내까진 차로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가는 동안 말라가엔 점점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창밖 풍경을 보니 무엇보다 부다페스트나 베를린보다 확실히 춥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처음 온 도시의 낯선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숙소에 어느새 도착이다. 친절한 기사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들어왔다. 말라가에서 우리가 사흘 밤 동안 머무를 곳은 Apartamento Plaza Montaño라는 이름의 아파트먼트이다.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에서는 호텔 느낌의 숙소를 예약했다면, 말라가 이후 일정은 아파트 느낌의 숙소를 예약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다는 점과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이제 빨래를 하지 않고선 안 될 시간이 점점 되어가고 있었다. 친절한 호스트를 만나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깨끗하고, 기대 이상으로 아늑한 느낌이라 마음에 꼭 들었다.                  

                                       

스페인 말라가에서의 첫 장보기 미션 (2020.1. 스페인 말라가)


저녁 7시, 저녁부터 먹기로 한다. 도시를 이동하느라 힘을 다 썼다. 워낙 늦은 시간에 식사하는 문화를 가진 스페인이란 나라에서 19시는 분명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고, 아이들도 너무 어리다. 지금 어딘가 식당에 찾아가는 일은 번거롭다고 느껴져, 장을 봐와서 저녁을 차려 먹기로 했다. 구글 지도를 여니 숙소 한 블록 옆에 Dia라는 이름의 슈퍼마켓이 있었다.

유럽에 와서 슈퍼마켓에 가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물건들, 눈을 의심케 하는 저렴한 가격까지. 나도 아내도, 그리도 아이들도 피곤하지만, 장을 보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슈퍼마켓은 기대 이상으로 큰 규모였다. 한참을 구경하다 우선 필요한 물과 달걀, 그리고 아이들 간식 등을 사서 들어왔다. 본격적인 장보기는 내일로 미루고, 우선은 당장 필요한 것들만 사 들고 왔다.

말라가에서의 첫 저녁 식사 메뉴는 달걀과 소시지, 그리고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우동. 그리고 오늘 베를린에서 아침으로 먹고 남은 쌀밥까지. 이번엔 먹을거리는 안 챙기겠다고 노력했지만, 우동을 좋아하는 첫째 녀석 덕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브랜드 우동을 여기까지 들고 왔다. 짐이 많아 하루라도 빨리 털어버리고 싶었다. 맛도 있지만, 홀가분한 기분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아이들도 엄청나게 잘 먹는다. 나도 아내도 평소 양보다 많이 먹어 버렸다. 덕분에 차리면서도 이걸 누가 다 먹냐고 농담을 했던 일이 민망하게 되어버렸다.                                   

                 

말라가에서의 첫 저녁 만찬(?) (2020.1. 스페인 말라가)


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이 잠시 노는 사이, 뒷정리하고 잘 준비를 시작한다. 집이 깨끗하고, 인테리어도 아주 마음에 드는데 다소 춥게 느껴진다. 거실에는 냉난방기가 설치되어 있어 괜찮은데, 문제는 침실. 결국 우리는 침실의 매트리스를 거실로 옮기고, 거실에서 다 같이 자기로 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방 구조를 이렇게 우리 편의대로 바꾸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이 투숙객 매너인가 아닌가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파손 없고, 완벽하게 원상복구를 해 놓는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아이들을 갖기 전 나였다면 달리 생각했을 수도 있을 거 같긴 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말라가에선 3박이나 할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가 편하게 집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지난 5일간의 사진 정리도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내일과 모레 말라가에서의 일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우리가 스페인 말라가라는 도시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말라가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말라가에 꼭 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이 도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다. 우리의 여행이 늘 그렇듯,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기 와 있다. 베를린에서 갈 수 있는 도시를 검색하다, 저렴한 항공권을 샀을 뿐이다. 그리고 이곳을 거쳐 포르투갈까지 가는 길도 편리해 보였다.

한 번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가보고 싶단 생각은 했었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Alhambra)와 세비야 대성당(Catedral de Sevilla), 그리고 론다 지역에 가보고 싶었다. 기왕 말라가까지 온 김에 그 도시들까지 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우리 일정이 너무 짧다. 아무리 가까워도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는 비용 부담도 컸다. 결국, 이틀 동안 여유 있게 말라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바다를 품고 있고, 해산물과 과일 등 먹거리가 풍부한 이 도시.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고, 무엇보다 숙소가 맘에 들어 다행이다. 아무리 계획과 기대 없이 왔어도, 잠시 경험한 말라가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안 좋은 느낌이어도 기왕 온 거 나름의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간 이곳 나름의 매력을 한껏 느끼고 돌아가길 고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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