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4 Lisbon
리스본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한다.
가족 모두 일어난 시간은 아침 8시 무렵. 일어나자마자 나는 포르투에서 못하고 밀린 빨래를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다행히 숙소에 세탁실이 있어 편하게 세탁을 할 수 있다. 그 사이 아내는 아침을 준비한다. 오늘의 아침식사 메뉴는 계란국과 김. 그리고 어제 기차에서 먹고 남은 약간의 빵이다. 어제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도 사실 부실하긴 하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아직은 불평을 하진 않는다. 아직 장을 못 봐 뭔가 해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오늘은 꼭 반드시 마트에 가야 한다. 열약한 환경 속에서도 조미김은 언제든 진리다. 사실 김과 밥만 있어도 훌륭한 식사가 될 수 있다.
준비를 마치고, 10시 30분경 길을 나선다.
하늘에 구름이 한가득. 오늘 파란 하늘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다. 파란 하늘은 커녕 비가 내리진 않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실망은 최대한 짧게. 여행 중 날씨는 내가 결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온 이상 날짜를 잘못 정했다고 후회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포기가 빠를수록, 한시라도 빨리 마음에 평안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날씨뿐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좀 더 나아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나도 어렸을 땐, 젊었을 땐 그랬다. 뭐든 잘해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그런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그게 공부건, 운동이건, 게임이건. 뭐든 말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니 세상엔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 운동이나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더라. 그러다 보니 적당한 수준에서 스스로 만족하고 포기하는 법을 익혔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를 보거나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지금 내가 축구 선수가 될 준비를 하겠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나의 그런 용기를 누군가 그것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내 편이고 날 진정으로 응원해 주는 걸까? 유명한 노래 중에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마'와 같은 가사의 노래가 있고, 물론 때로는 그런 말들이 삶의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 언어 속에 담긴 메시지와 내 내면의 행복은 함께 갈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정말 포기할 수 없는 극소수의 것들만 제외하고, 삶의 많은 부분들을 적당히 포기할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잘' 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붙들고 살아가기도 한다. 세상엔 내가 할 수 있지 않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존재한다. 내가 어떤 인종으로 태어나고,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는 지의 문제라든지. 작게는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으로 누굴 만난다든지. 나의 부모님이 누구이고, 또는 내 아이들이 누구인지. 이런 것들은 결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의 일들이 아니다.
육아의 과정 속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며 배우게 된다. 아이의 성향, 행동 양식, 습관 등이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울수록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 방법은 없다.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줄 수 있는 도움을 주거나 지원을 해 줄 수 있지만, 결국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클지는, 아이 스스로 결정해 나갈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흐리지만, 다행인 건 생각보다 공기가 차갑지는 않다.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면 두 개의 전망대가 있다. 처음 만나는 곳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Miradouro das Portas do Sol)이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산타루치아 전망대(Miradouro de Santa Luzia)가 있다. 번화가로 나가기 전 잠시 전망대에 들렀다. 회색 하늘과 다홍빛 지붕이 어우러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좋은 날씨에 온다면 리스본 동남쪽 방면의 풍경이 너무 멋질 거 같았다. 리스본에서의 남은 날들, 부디 맑은 리스본의 하늘을 볼 수 있게 되길.
호텔 앞에서 전망대까지 가는 도로는 거의 이면도로이고, 트램과 차가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했다. 사실 어젯밤, 택시를 타고 호텔로 오는 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사진으로 봤던 리스본 트램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었다. 하지만 실제 트램은 생각보다 크고 묵직하며, 속도가 꽤 빠르다. 그리고 트램과 차가 같은 도로를 함께 이용하다 보니, (물론 그들만의 규칙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질서 없이 그냥 마구잡이로 다니는 것 같았다. 택시가 정차하면, 바로 거의 닿을 정도로 뒤에 와 트램이 정차하는데 그게 참 무섭다. 아마 리스본에 처음 와봤다면 무슨 말이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하루 만에 조금 익숙해진 탓일까. 해 뜬 시각 트램의 모습은 무섭기보단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는 시내 중심가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아직 교통권을 못 사 트램을 탈 돈이면 택시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버를 이용해 택시를 호출했고,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번화가에 오자마자 들른 곳은 바로 에그타르트 전문점. 우리나라에도 요즘은 타르트를 많이 팔고 있고, 마카오에서도 포르투갈식 타르트라고 해서 접해봤지만. 현지의 맛이 너무 궁금했다. 아마 유명한 가게가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선택한 곳은 Manteigaria란 곳이다. 투명 유리 너머로 직접 타르트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저 신기해한다. 우리는 커피와 타르트 두 개를 사서 나누어 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먹었던 에그타르트와 크게 다른 점은 모르겠다. 나는 원래 미각이 둔한 편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포르투갈 리스본에 와서 타르트를 먹어봤다는 사실 만으로도 즐거운 기분이다.
오늘은 사실 큰 계획은 없다. 번화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후 쇼핑몰에 가는 일정이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한식을 먹기로 했다. 날도 흐리고,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흰쌀밥으로 배를 채우고 싶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K-BOB이라는 이름의, 누가 봐도 한국 음식을 파는 듯싶은 식당을 찾았다. 유럽 웬만한 도시에는 한식당이 다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천천히 번화가 상점을 구경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리스본의 번화가는 아우구스타 개선문(Arco da Rua Augusta) 안쪽(북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상점가를 지나 쭉 따라 올라가다 보면 페드로 4세 광장(Praça Dom Pedro IV)과 상 도밍고 성당(Igreja de São Domingos)을 만날 수 있다. 광장과 성당, 그리고 주변의 작고 큰 여러 상점엔 많은 인파들로 붐빈다. 너무 복잡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싶은데, 녀석들이 꼭 이럴 때면 거부한다. 많은 사람을 보고 자기들도 뭔가 해야겠다고 느끼나 보다. 혹시라도 아이들을 놓칠까 손을 꼭 붙잡고 식당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익숙한 음식 향기가 코를 찌른다. 예상한 대로 한국분께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우리는 메뉴판을 보고 순두부와 비빔밥, 그리고 파전을 주문했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이 얼마나 어울리는 음식들인가. 비빔밥은 아이들과 같이 먹어야 하니 양념장을 따로 부탁드리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린다. 유럽에 온 지 열흘이 넘어가니 한식이 꽤나 그리웠나 보다. 잠깐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 그리 긴지. 덕분에 음식이 나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말도 없이 폭풍 흡입을 완료했다. 사실 큰맘 먹고 3개 메뉴를 시킨 건데, 더 주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니 1시다. 곧 아이들 낮잠 시간. 밥 먹자마자 자라고 하는 건 좀 그래서, 식당 바로 앞 광장(Praça Martim Moniz)에 들러 아이들이 뛰어놀 시간을 가진다. 비가 내려 바닥이 미끄러워 보인다.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지만, 아이들은 그저 신나 뛰어놀기에 바쁘다. 걱정이 돼도, 즐거워 떠드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더군다나 시끄럽다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공간에선 더욱이.
간단히 소화를 시키고,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근처 커피숍으로 발을 옮긴다. 드디어 하루 중 가장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가 찾아온 카페는 Fábrica Coffee Roasters라는 커피전문점. 아직 커피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커피를 직접 볶는 곳은 그만큼 특별한 맛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정도는 가지고 있다. 마침 야외에 자리가 있어 자리를 잡고, 필터 커피를 주문한다. 커피가 다 준비될 무렵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주 큰 쇼핑몰에 가기로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잠들었다. 완벽한 타이밍! 우리는 막 내려진 커피를 받아 들고, 마치 커피에 조회가 깊은 사람들처럼 음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역시 우린 커린이(커피 어린이)였다. 뭔가 특별한 향이 분명 있긴 한데, 너무 특별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역시 우리에겐 아직 쓰디쓴 스타벅스 커피가 입에 맞나 보다.
커피를 거의 다 마실 무렵, 아이들이 깨기 전에 아이쇼핑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길을 나섰다.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 구글 맵에서 검색하니 리스본 북부에 엄청난 규모의 콜롬보 쇼핑몰(Colombo Shopping Centre)이 있다고 한다. 쇼핑몰까진 전철로 20분. 이제 드디어 24시간 교통권을 구입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현재 우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Restauradores역이지만, 우리는 한 정거장 떨어진 Baixa-Chiado역까지 가기로 한다. 마침 그곳에 ZARA와 H&M과 같은 상점이 있었고, 아이들이 깨기 전에 구경하고 싶었다. Baixa-Chiado역 인근을 구경하는 중에 아이들이 잠에서 깼고, 우리는 약속대로 매트로를 타고 콜롬보 쇼핑몰로 이동했다.
구글에서 찾아본 대로 쇼핑몰의 규모는 엄청났다. 우리가 도시마다 쇼핑몰을 찾는 이유는 사실 나와 아내의 욕심도 있지만, 세현이가 꼭 사고 싶은 장난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계속해서 BRIO 기차 장난감을 사고 싶어 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브리오 기치를 파는 상점을 찾지를 못했다. 여기 쇼핑몰에도 꽤 큰 규모로 장난감 판매점이 있지만, BRIO 기차는 보이질 않는다. 원하는 장난감을 찾지 못해 세현이는 오늘도 실망을 했지만, 상황을 잘 이해해줘서 고마웠다. 한편 온이는 가수 놀이를 한다고 그냥 신났다. 엄마는 온이의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몇 편의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쇼핑몰 안 대형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다시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을 쇼핑몰에서 먹고 갈까 하다, 그냥 숙소로 들어가 먹기로 결정했다. 쇼핑을 먼 곳까지 와서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매트로를 타고, 도보를 이용해 Praça Martim Moniz 광장까지 이동했다. 그곳에 숙소까지 가는 트램 정류장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검색을 하고 트램을 기다리기 시작하는데, 트램이 오질 않아 한참을 기다렸다. 결국 거의 30분을 기다려서야, 고대하던 리스본 트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오니 밤 8시. 예상했던 거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어, 핑계 삼아 오늘 저녁도 간단히 먹기로 한다. 몇 개 남지 않은 라면을 끓여 아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해외에 와 밤에 먹는 라면의 맛도 진리. 순식간에 배를 채우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 속에 움츠리고 다녀서 그런지 피곤한 하루다. 흐린 날의 리스본도 특별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일은 부디 더 좋은 날씨의 리스본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가져 본다. 잘 버티고, 잘 놀아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움의 인사를 건네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