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5 Lisbon
어느덧 리스본에서의 세 번째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창 밖을 살핀다. 오, 구름이 없진 않지만, 어제처럼 흐린 날씨는 아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을 내서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준비를 해 나가 보자고 다짐을 한다. 오늘 아침 메뉴는 사진과 같이 버섯 감자조림과 감잣국, 그리고 계란과 김이다. 어제와 비교하면 부쩍 메뉴 수가 늘어났다. 이 정도면 우리 가족에겐 아주 훌륭한 아침 식사라 할 만하다. 식사 후 아이들이 바닥에서 꽁냥꽁냥 놀고 있고, 나와 아내는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 아내가 계획한 리스본 여행 일정은 점심을 먹고 LX FACTORY라는 곳을 방문했다가, 다시 시내 쪽으로 와 대성당을 구경하는 코스이다. 아이들과 여행에선 하루 최대 2개 정도의 일정을 잡는 게 적당하다. 오랜 경험상 3개 이상의 코스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 일정도 숙소가 대성당에서 멀지 않기에, 실질적으로는 1개의 일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것도 리스본에서 3박을 하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이긴 하다.
요란스럽게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역시 오늘도 늦어졌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니 시간은 벌써 10시 30분. 호텔 앞에서 트램을 타고 번화가로 나오니 11시가 됐다. 오전 일정은 무리고, 결국 점심식사를 고민해야 할 시간. 잠시 고민하다 커피를 한잔 먹고 싶기도 하고, 아침을 잘 먹었으니 점심은 간단히 먹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 먹으러 갈만한 카페가 있는지 검색해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먹을 만한 메뉴가 없어 결국 커피만 주문하게 되었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검색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잠시 영상 시청할 시간을 주고, 아내와 구글맵을 뒤지기 시작한다. 한참을 검색한 끝에 오늘은 타임아웃 마켓(Time Out Market Lisboa)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구글에 있는 정보를 우리가 이해한 대로 설명하면, 아마 포르투갈 전역의 유명한 식당이 팝업스토어 형태로 장사를 하는 곳이라고 판단했다. 우리가 원하는 메뉴를 이것저것 골라 푸드코트처럼 먹을 수 있어 괜찮아 보였다. 우리는 늘 식사 메뉴를 못 정하거나 가족 간에 합의가 어려울 때면, 생각 없이 푸드코트에 가서 여러 가지 메뉴를 시키곤 한다.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 걸렸을까, 타임아웃 마켓에 도착했다. 다소 외곽 지역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식사를 하고 있다. 몇몇 가게는 줄을 서야지만 주문을 할 수 있는 지경이다. 건물 규모도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여서 어떤 메뉴가 있나 돌아보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어떤 가게에서 어떤 음식을 팔고 있는지 구석구석 살펴봤다.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결국 우리가 결정한 점심 메뉴는 먹물 스파게티와 수제 햄버거, 감자튀김. 3개 메뉴를 시킬까 고민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참았다. (포르투갈의 비교적 저렴한 물가를 생각하면) 생각했던 거보다 가격대가 있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후에 가는 곳에서 또 이것저것 사 먹을 요량이었다.
나름 인기가 많아 보이는 가게에서 주문을 해서인지 식사가 준비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이런 개방된 공간에선 아이들과 기다리는 시간이 불편하거나 어렵진 않다. 기다리던 음식은, 비주얼만큼이나 꽤 괜찮은 맛을 지니고 있었다. 혹시 먹물 스파게티를 아이들이 못 먹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이제 먹는 걸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가장 심하게 편식하는 건 아빠인 듯싶다. 2개의 메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라도 더 시켜야 할까? 아내에게 묻지만, 아내는 더 맛있는 디저트를 먹자며 나를 자제시켰다. 그리하여 고급 푸드코트에서의 점심식사를 잘 마치고 우리는 또다시 길을 나섰다.
타임아웃 마켓에서 LX FACTORY까지 연결되는 버스와 트램이 있다. 하지만 어제 오후에 산 교통티켓 시간이 이제 곧 끝난다. 우리는 근처 전철역으로 가 새로운 24시간 티켓을 구입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떤 도시는 1일권으로 자정까지 사용이 가능한 교통티켓을 파는 반면, 리스본처럼 개시 시점부터 24시간 동안 사용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24시간 패스가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는 근처 Cais do Sodré역으로 가 티켓을 구매했다. 이게 뭐라고, 새로운 패스가 생기니 뭔가 마음이 든든하다. 구글맵을 통해 교통편을 검색하니, 버스 출발 시간이 더 가깝다. 트램을 타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LX FACTORY가 있는 Calvário역에서 하차했다.
LX FACTORY는 여러 편집샵과 식당이 밀집되어 있는 예술문화 공간이라 한다. 정보를 찾아보니 19세기 초반 공장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재창조해 예술 공간으로 만든 것 같다. 근대 산업화 시기 유산들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시도는 꽤 많은 지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였던가, 그런 비슷한 공간에 가봤던 기억이 있다.
입구를 들어서니 역시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사실 나나 아내나 모두 예술 쪽으로는 워낙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뭔가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간 안에는 소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나 카페, 식당이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와 아내는 여러 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시도한다. 이내 아이들은 잠들었고, 우리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번 여행 중엔 아이들이 생각보다 낮잠을 잘 자서 신기하다. 우리의 육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잠 문제가 항상 제일 큰 문제였다. 밤잠은 물론이고 낮잠까지도. 그거 때문에 힘들었고, 아이들이 잘 잘 때면 그만큼 행복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베를린에서 온이가 한 번 안 자겠다고 끝까지 버틴 걸 제외하면, 정말 양호하다. 누군가는 어떻게 아이들을 그렇게 매번 재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에겐 그냥 이게 일상이고,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보다. 반복된 경험으로 잘 자고 일어난 아이들이 더 잘 놀 수 있다는 확신도 있다. 그리고 아마 애들이 조금 더 크고 나면 이제 낮잠은 잘래야 잘 수 없는 일이 되겠지. 그저 잠시 동안 주어진 이 휴식시간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오후 3시 30분. 또 슬슬 이동을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세현이는 잠에서 깨고, 세온이는 아직도 자고 있다. 덩치는 비슷한데, 그래도 확실히 둘째가 더 어리긴 한가보다. 엄마와 세현이는 몇몇 장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다음 일정인 리스본 대성당에 가기로 한다. 세현이는 오늘 길에 버스를 탔으니, 갈 땐 트램을 타겠다고 주장을 한다. 구글맵을 검색해도 트램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고민했지만, 세현이의 주장을 존중하기로 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트램에 탈 수 있었다.
트램을 타고 20분 남짓, 아우구스타 개선문(Arco da Rua Augusta)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트램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기준으로 강 쪽에는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 있고, 시내 방면으로는 개선문이 보인다. 광장의 규모는 엄청나고(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라고 한다), 정말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참 좋겠다. 어제보다 날씨가 좋아 가족사진도 찍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온이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내일 아이들이 깨 있을 때 다시 오기로 하고 엄마와 세현이, 그리고 유모차 안에 있는 온이(무릎 아래 부분만 사진에 나왔다)까지 사진을 남긴다. 우린 개선문을 통과해 대성당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세온이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기미가 없다. 대성당 방면은 또다시 가파른 언덕길이어서 유모차를 끌기 쉽지가 않다. 다행히 세현이는 내려서 걷기 시작했고, 이제 온이도 깨워야겠다. 세온이는 잠에선 깼지만, 유모차에서 내리긴 거부한다. 세온이가 유모차에서 안 내리니, 세현이도 덩달아 다시 유모차에 타겠다고 요구. 우린 다시 유모차에 두 아이를 태우고 대성당과 주변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닌다. 대성당을 배경으로, 그리고 오고 가는 예쁜 트램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이제 오늘의 진짜 마지막 일정. 아이들과 리스본에 온 기념으로 이곳을 대표하는 기념품, 바로 트램 모형을 사기로 했다. 여러 상점을 돌아다녀보니, 당연하게도 가격이나 품질은 다 비슷비슷. 우린 세현이가 좋아하는 초록색, 세온이가 좋아하는 노란색 트램을 하나씩 샀다. 과연 새것이 맞나 싶은 느낌이었지만,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탔던 트램 모형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눈치다. 원래 들고 다니던 기차 장난감을 이제 뒷전으로 물러날 느낌이다.
오늘 하루, 사실 많은 걸 하진 않았지만 알차게 보낸 기분이다. 가족 모두 등장한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분명 아이들이 더 컸는데, 2018년 여행 때보다 아이들과 사진 찍기가 더 어렵다고 느낀다. 그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점점 더 부모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일까. 2년 전엔 적어도 세온이는 거의 아기띠 안에 있거나, 유모차에 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다시 유럽에 오게 될 땐, 유모차도 없이 와야겠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걱정이 된다.
문득 며칠 전 말라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해안 광장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서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길을 가고 있었다. 아내와 "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다니네" 하면서 지나쳤다. 그런데 잠시 후 저 앞에서 매우 급한 표정의 한국인 부부가 현지 경찰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혹시 아까 아이들의 부모가 아닐까 싶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예상은 맞았고, 아이들을 찾고 있다고 한다. 우린 아까 저 쪽으로 지나간 형제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전달했고, 별문제 없이 상황은 해결되었다.
그 가족이 겪은 일을 보며 아내와 우리도 그런 일을 겪을까 두렵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아이들이 참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까닭으로 부모와 아이들이 잠시 떨어지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고학년 형은 마치 자신이 부모라도 된 것처럼 두려운 기색도 없이 동생의 손을 잡고 길을 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과연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세현이가 울지 않고, 세온이를 이끌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직 상상이 안 간다. 나는 두 형제 중 막내라, 첫째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무게와 책임감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나의 형을 보며, 그리고 두 아들 중 첫째 세현이의 모습을 보며, 그 무게가 만만치는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는 중이다. 세현이와 세온이가 부디 서로 의지하는 우애 깊은 형제가 될 수 있길.
이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할 시간이다. 오늘은 숙소에 들어가 맛있는 문어 스파게티를 해 먹기로 했다. 어제 마트에서 엄청난 양의 문어 슬라이스를 구입해놨다. 아이들에게도 엄청 맛있는 스파게티를 해 주겠다고 잔뜩 허풍을 떨어놓았다. 들어오자마자 요리를 시작한다. 문어의 양이 너무 많아서 맞추다 보니, 스파게티 양이 어마어마 해졌다. 이렇게 많은 양의 스파게티를 만든 것은 생전 처음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문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다. 아니, 요리를 할 줄 몰라서일까. 문어를 다뤄보는 것도 처음이다. 생각보다 너무 비린 문어 탓에, 이 많은 양의 스파게티 맛이 영 별로이다. 그나마 문어를 빼고 먹으니, 먹기 힘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쉬움 한가득 남은 저녁 식사 시간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은 한 시간 전에 사 온 트램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 바쁘다. 내일이면 또 리스본을 떠나 이동하는 날. 빨래도 돌려야 하고, 짐 정리도 해야 한다. 생각보다 정리할 게 많아 일찍 들어오길 잘했다고 위안을 삼으며,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도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