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6 Lison Wien
드디어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어제 너무 일찍 잔 탓일까. 7시 조금 넘어서 세현이가 잠에서 깬다. 덕분에 엄마, 아빠, 세온이 순서대로 모두 일찍 일어났다. 아이들을 다시 재울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은 마지막 날이기에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쓰자고 생각해 바로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 메뉴는 계란국과 계란 버섯 야채 햄 볶음밥. 이름이 거창하지만, 그냥 남은 식재료를 다 때려 넣은 볶음밥이다. 내가 씻는 동안 아내가 밥과 재료 손질을, 아내가 씻는 동안 내가 계란국과 볶음밥을 만든다. 완벽한 협업 체계다. 여기에 조미김까지 덧붙이면 아주 훌륭한 식사가 된다. 아직까지 김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식사를 마치고 청소와 짐 정리를 위해 아이들에게 태블릿으로 영상을 틀어 주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원칙 중 하나가 집 안에서는 휴대폰 사용은 안 된다는 것. 원칙의 근거는 거창하진 않다. 그냥 집 안에서 까지 아이들이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기에 부모가 불편할 뿐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같이 영상을 봐야 하는데, 아직까진 둘의 수준이나 취향이 비슷해서 다행이다.
정리를 다 마치고 나니 10시 30분.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은 11시인데, 청소를 위해 스테프가 벌써 문 앞에서 대기 중이다. 뭔가 쫓기는 심정으로 급하게 짐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리고 1층 무인 짐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바로 마지막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 첫 번째 일정은 바로 숙소 바로 아래 전망대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그제 방문했을 때 날이 흐려 사진을 못 찍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씨는 그제보단 낫지만, 어제보다는 흐리다. 말라가에서와 같은 맑은 날씨를 기대했는데, 조금 아쉽지만 비 안 오는 거에 감사해야지. 참 신기하게도, 리스본 풍경과 아이들이 들고 있는 트램 모형이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이전부터 엽서 등에서 사진으로 봤던 시각적 효과인지 모르지만, 초록 노랑 빨강 트램과 어우러진 도시 분위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Miradouro das Portas do Sol)와 산타루치아 전망대(Miradouro de Santa Luzia), 그리고 전망대를 품고 있는 공원(Praça Júlio de Castilho)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사진을 남겼다. 마치 이곳을 떠나기 전, 아름다운 풍경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나와 아내는 리스본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무거운데, 아이들은 아쉽지 않나 보다. 어떤 면에서는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즐기고, 웃을 수 있는 것도 좋은 거 같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생각만 많아진다. 그래서 점점 단순한 삶에 대해 동경하게 되나 보다.
Praça Júlio de Castilho라는 이름의 공원에는 아줄레주로 장식된 아주 아름다운 벽면이 있다. 보자마자 아내와 여기에선 꼭 가족사진을 남겨야 한다며 오랜만에 삼각대를 설치했다.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는 사이 아이들은 떠들며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아내는 늘 불만이다. 무슨 사진 찍는 준비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냐며. 난 원래 그런 법이라며 갖은 핑계를 대지만, 사실 나의 기술이 부족한 탓이다. 준비가 끝나고 사진을 찍어보지만, 생각처럼 타일의 오묘한 색감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아이들이 기분이 좋았는지, 표정이 너무 밝아서 다행이다.
전망대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한다. 우린 한번 더 타임아웃 마켓에 방문하기로 했다. 어제 먹은 햄버거가 또 먹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 유명한 28번 트램을 타고 이동한 후, 10분 정도 걸어 도착. 사람으로 붐비기 전에 오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느낌이다. 12시쯤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오늘은 햄버거를 제외하고, 새로운 메뉴를 먹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택한 요리는 문어밥과 대구 스테이크이다. 어제 양이 부족해 조금 아쉬웠기에, 오늘은 큰맘 먹고 3개 메뉴를 주문했다. 문어밥과 대구는 생각보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특히 고수가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고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맛이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고수의 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내는 나보단 나은데, 의외로 아이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이다. 역시, 우리 가족 중 가장 심각한 편식쟁이는 아빠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일정을 시작한다. 마지막 날이어서 마음이 조급한지, 아내가 오늘은 조금 타이트하게 일정을 준비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꼭 사진을 찍고 싶은 곳을 찾았다고 한다. 노란 푸니쿨라가 정차되어 있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란다. 식당 근처이기에 금방 찾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근처까지 가도 도저히 푸니쿨라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한참을 돌아다녔다. 나는 사실 포기하고 싶었는데, 아내는 꼭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던 중 누가 봐도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이 집 같은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보인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 들어갔고,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목표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안내 표지판 하나 없이 이렇게 되어있을 줄이야.
바로 티켓을 사서 푸니쿨라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느라 지친 아빠의 마음도 몰라주고, 아이들은 신나서 푸니쿨라 안에서도 장난치기 바쁘다. 핸들도 직접 잡아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서로 잡겠다고 난리다. 잠시 후 푸니쿨라는 위에 도착했고, 아내가 원했던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발견한 예쁜 사진처럼 찍을 장비도 기술도 없다는 게 문제. 그저 이곳에 왔다 간다는 인증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가야만 한다. 아내는 조금 실망한 눈치다.
이제 정말 리스본의 마지막 일정이다. 바로 어제 갔던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가족사진 찍기. 어제는 세온이가 잠에서 안 깨 사진을 남기질 못했다. 다시 28번 트램을 타고 광장에 곧 도착했다.
현재 시각 오후 2시. 빈으로 가는 비행기는 저녁 5시 45분 출발. 숙소에 가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려면,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광장에 바람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도저히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 바람이 잦아들길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력한 바람을 맞으며 겨우 아내와 아이들만 인증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숙소로 올라가는 트램을 타기 위해 번화가로 들어왔는데, 길에서 스타벅스 음료 50프로 할인쿠폰을 나누어주는 게 아닌가. 아니, 스타벅스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고? 공짜 좋아하면 안 되지만, 이게 뭐라고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진다. 기왕 받은 쿠폰 잘 쓰고 가야지. 바로 옆 매장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리스본 에스프레소 잔도 사고 싶었지만, 공항에 가서 사기로 한다.
그런데 커피를 기다리는 사이, 세온이의 애착 인형(민트색 인형인데, 아이들은 M&M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공짜가 공짜가 아니었구나. 그냥 가기엔 너무 서운해서, 급하게 왔던 길을 살피며 되돌아갔다. 걷다 보니 코메르시우 광장에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찾는데 실패했다. 엠앤엠 인형이 사실 온이의 애착 인형이긴 하지만, 애착의 정도는 오히려 세현이 쪽이 더 컸던 거 같다. 세온이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눈치지만, 되려 엄마와 세현이가 너무 아쉬워한다.
세현이는 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 아이 구분하는 게 어디 있겠냐만은, 어렸을 땐 남자아이가 너무 인형을 좋아해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3살 때였나, 타이베이에 가서 애착 인형을 잃어버려서, 비슷한 타이베이 백화점을 뒤졌던 기억도 있다. 세현이는 이 먼 리스본에서 M&M 혼자 울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기 시작한다. 세온이는 그저 찾아 오라고만 되뇔 뿐이다. 그 밝은 민트색 인형이 안 보인다면, 이건 필히 누가 가져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쉽지만,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거라고 위로를 건넸다.
급하게 트램을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짐을 찾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버 택시를 호출한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 기사가 공항에서 1 터미널인지, 2 터미널인지 질문을 한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미처 확인도 못하고 있던 중. 우리는 우리가 이용할 곳이 2 터미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확인했다. 친절한 기사 덕에 공항까지 무사히 이동. 이동하는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공항 입구에 들어서니 오후 4시가 되었다.
그런데 2 터미널은 우리가 생각한 공항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곳도 임시로 만들어 놓은 공간처럼 되어 있었고, 스타벅스가 전혀 있을 거 같지 않다. 스타벅스 리스본 에스프레소 잔을 사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다. 역시 여행을 할 땐, 미루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체크인을 완료하고, 아이들 덕분에 우대 출입구로 편하게 심사를 완료할 수 있었다.
면세구역에 들어오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탑승을 준비 중이다. 비행기 시간이 애매해 저녁이 걱정이다. 원래는 공항에 와 먹으려 했는데, 2 터미널엔 식당가도 마땅치가 않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빵과 커피를 구입하고, 아침에 남겨온 볶음밥은 아이들에게 준비해 주었다. 하지만 낮잠을 못 잔 아이들이 너무 많이 피곤해한다. 입맛도 없는지 영 먹으려 하질 않는다. 탑승 30분 전, 유모차를 맡기고 차례를 기다려 비행기에 올라탔다. 실내에서 줄 설 땐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순환 버스를 타고 비행기 앞에 가 내리니 비가 그쳤다. 사실 리스본에 오기 전 계속 비 예보가 있어 걱정이었는데, 날씨는 흐렸을지언정 비가 내리지 않아 참 감사한 일이다.
지기 시작하는 해, 비가 그친 하늘과 구름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너무나 아름답다. 우리 여행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드는 것만 같아서 뭔가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계단을 오르던 중 갑자기 세현이가 M&M을 데리러 다시 리스본에 오겠다며 큰 소리로 외친다. 깜짝 놀라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아마 그만큼 서운했던 거 같다. 세현이는 이륙하면 잔다고 하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었고, 온이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이내 곧 눈을 감았다. 부모도 이렇게 피곤한데, 아이들은 정말 피곤하겠다.
3시간 여 비행 끝에 오스트리아 빈에 무사히 도착했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10시가 넘은 시각. 예약을 할 당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늦은 시간대 비행기를 예약했는지 조금은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어차피 부다페스트로 돌아가야 하는데, 빈으로 오는 항공 가격이 너무 저렴했던 탓이다. 이 늦은 시간에 빈에 들어와 하루를 자고, 내일 다시 부다페스트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뭐, 항상 그렇듯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늦은 시간, 중앙역까지 가는 기차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중앙역에 도착하니 거의 12시. 다시 한번 생각해도, 너무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나마 비행기에서 잘 자고 일어나서 버티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오스트리아의 날씨는 역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서운 추위가 이 여행이 정말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듯하다. 중앙역에서 호텔을 찾는데 다소 애를 먹긴 했지만, 무사히 호텔 방에 들어오니 집에 온 거 같은 편안함이 찾아왔다.
빈, 그리고 또 한 번 부다페스트. 우리 가족 모두 부디 마지막까지 잘 버틸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