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1 Budapest
여행 마지막 날 새벽. 5시가 조금 안된 시각. 호텔 문을 나선다.
어젯밤 짐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힘들게 사온 에스프레소 잔이 대체 보이질 않는다. 캐리어 안을 몇 번을 뒤져도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살 수 없는 물건.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느냐만은,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포기가 빠른 나지만, 요건 쉽게 포기가 안 되네. 바치 거리 집에 두고 왔을 수도 있다. 가서 확인을 해야겠다. 다행히 일찍부터 트램은 운행을 하고 있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 어디에도 에스프레소 잔은 안 보인다. 우리가 다녀간 흔적이라곤 분리해 놓은 쓰레기뿐. 혹시나 해서 쓰레기 더미를 찾아보지만, 에스프레소 잔은 찾을 수가 없다. 이 정도 했는데 없으면, 없는 거다. 포기할 수밖에. 아쉽지만 할 수 있는 걸 해봤으니 후회는 안 남겠지. 다만 대체 그게 어디로 갔을지, 너무 궁금하긴 하다.
다시 급하게 호텔로 복귀했다. 언제 또 이 새벽 시간 부다페스트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 시간은 빠듯했지만, 나는 세체니 다리에서, 그리고 국회의사당 건너편에서. 새벽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명이 반쯤 들어온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꼭, 안갯 속 타지마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새벽부터 빠른 걸음으로 운동을 했더니 피곤하긴 한데,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연락을 해 아이들과 외출 준비를 요청했다.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쉬웠다. 족히 열 번은 국회의사당 건너 길을 오고 다니면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떠나는 날 아침 사진을 찍는다.
아침 7시 30분 무렵. 급하게 아이들과 길을 나섰지만, 짙은 안개에 가려 국회의사당은 희미한 형태로 확인이 가능할 뿐이었다. 어젯밤 어부의 요새에서도, 그리고 오늘 아침도. 결국 미뤄 놓았던 가족사진 촬영 작전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찍어 놓은 사진으로 만족해야지. 다음 여행 때는 반드시 날씨 좋은 날에 우선 사진부터 남겨야겠노라 다짐을 하게 된다.
호텔로 들어와, 이제 정말 떠날 준비를 한다. 정리해 놓은 짐을 챙겨 내려와 1층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창문을 통해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준 식당도 오늘이 마지막. 1층 식당 창문으로 보이는 경치만으로도 정말 가격 대비 최고의 호텔이다. 하지만 경치를 즐기며 식사할 여유는 없다.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택시를 호출한다.
택시로 공항버스 정류장에 있는 Deák Ferenc tér M까지 이동한 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 창문 밖 짙은 안개가 심상치 않다. 점점 농도는 짙어지고 있다. 아내와 이 정도면 비행기가 뜰 수 있는 거냐며 웃으며 대화를 나눠 보지만, 마음 안에선 점점 겁이 나기 시작한다. 2018년 여행 때도 한국 오는 비행기가 취소되어 돌아오는 길이 험난했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그때와 동일한 폴란드 항공. 설마 아침에만 잠깐 안개가 생긴 거겠지. 출발은 점심시간이니까 분명 사라질 거야. 부디 비행기가 정시에 출발하길 기도하며 버스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부다페스트 페렌츠 리스트 국제공항 2 터미널. 두려운 마음을 부여잡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잔뜩 겁에 질린 우리를 보며, 항공사 직원은 안됐다는 표정으로 비행기 연착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이럴 거면 아침 일찍 연락을 좀 주지! 아침부터 급하게 왔는데. 당황스러운 비행기 연착 소식을 듣고, 마음속에서 온갖 불평이 슬글슬금 올라온다.
아니지,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 상황이 항공사 탓은 아니지 않나. 안개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면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마음속에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내를 쳐다보며, 그래도 캔슬은 아니네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나저나 두 아들 녀석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바로 그때 항공사 직원이 우리가 조금 안돼 보였는지, 안으로 들어가 이용하라며 '폴란드 항공 라운지 이용권'을 제공해 주었다. 앗, 이런 서비스도 가능하단 말이야? 나와 아내가 이런 선물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걸까. 그 순간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불평이 눈 녹듯 사라진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유치하고 단순하다. 이건 그냥 공짜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를 그렇게나 생각하고 배려해주었다는 사실에 고마운 건지. 어찌 되었건 덕분에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딜 힘이 생겼다.
오전 10시, 탑승구역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라운지로 직행이다. 폴란드 항공 라운지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쾌적했다. 준비된 음식도 가짓수는 적지만, 음료와 몇 가지 빵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사실 처음엔 1~2시간 연착을 예상했다. 금방 출발할 수 있겠지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우리 항공편 관련 소식은 잠잠하다. 아이들은 영상을 보고 있고, 아내와 나는 계속 출국 현황판만 바라보고 있다. 결국 아이들 낮잠도 잠시 잤다가, 점심까지 해결해버렸다.
사실 라운지에서의 시간은 너무 편안했지만, 시간이 지속될수록 조금씩 지겨워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 힘겹게 힘겹게 버티던 중, 오후 1시쯤 되었을까. 드디어 우리 항공편 소식이 전광판에 등장한다. 14:30 출발. 우리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 아이들도 비행기가 연착되어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이젠 안심이 되나 보다.
C3 게이트 앞. 라운지 안은 이상할 정도로 한산했는데, 탑승구 쪽은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공항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대체 왜 우리가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던 거지? 유아 동반 승객에 대한 라운지 제공 매뉴얼이 있나 싶었는데, 다른 승객들을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그 연유야 알 방법이 없다. 힘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다른 승객들을 보며,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항공사 직원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번엔 더 이상 연기 없이 정시 출발이다.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출발 시간이 늦어져서 사실 고생스럽긴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6~7시간만 버티면 아이들이 잠잘 시간이 된다. 만약 11시 15분에 출발했다면, 한국에 도착해서야 잘 시간이 됐을 테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시간이 늦어진 것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륙 준비를 마치고 비행기는 어느새 본 궤도에 올라 속도를 높이고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한국까지 10시간 조금 넘는 비행시간. 마지막 날 일정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솔직히 이야기하면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친구들과 비행을 한 것처럼, 아이들도 시간에 맞춰 밥을 먹었고, 필요할 땐 영상을 보았으며, 시간이 되었을 땐 눈을 감고 잠을 잤다. 그렇게 인천을 거쳐 집까지 무사히 들어왔다.
돌이켜보니 2018년 프랑크프루트까지 가는 비행. 베니스에서 파리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 그리고 이번 여행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비행. 지금 오늘의 비행까지. 네 번의 10시간 넘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을 아이들과 보냈다. 그런데 앞의 세 번에 비해 오늘의 비행은, 정말 할 만하다고 느꼈다. 할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이들과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거의 안 들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뒤 편에 앉은 어르신들이 인천에 도착 후 내리면서 아이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말씀을 할 정도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쁜 마음 때문에? 아니면 여행이 끝났다는 슬픔에서? 혹 그냥 너무 피곤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건 추측일 뿐이다. 아이들은 물어봐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냥 부모로서 느끼는 바는 아이들이 그만큼 자란 거 같다는 사실. 이번 여행의 출발과 마지막의 느낌도 분명 다르다. 혹시 아이들이 그 전의 일상과는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면서 한층 더 자란 걸까?
사람은 누구나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이 계획을 했건 하지 않았건, 또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배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배움 속에서 자라 간다. 우리 아이들도 여행 중 혹 어떤 계기들로 한 뼘이라도 자란 건 아닐까. 물론 부모의 막연한 희망사항으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그냥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고, 여행의 경험으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지면 좋겠다. 우리 가족의 연대감이, 아니 세현이와 세현이 둘 만의 관계에서만큼이라도 더 단단해지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