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홀로 여정을 지나던 그 시절의 나에게
현재 진행형이지만 어느 정도 비우고 비워낸, 마음 한 구석으로 밀쳐둔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새로이 맞이한 가정으로 인해 한참을 괴로워하고 원망도 많이 했고, 지금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당신께 들려주면 좋을까 싶어 먹은 마음이지만 그 시절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어쩌면 해결되지 못한 그때의 내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말이 길었습니다. 네, 이 이야기는 사실 외로운 여정으로 지쳐있던 그 시절 나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나는 살면서 그리 원만한 관계를 맺어오지 못했습니다. 곁에 남은 친구들이 두루 있지만, 모두 성격이 무던한 놈들이거나 아님 저와 한판씩은 붙어본 이들이지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제는 그저 남아있어 준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족 내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조직 생활에서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트러블이 찾아왔고, 어쩌면 제가 트러블메이커였는지도 모릅니다. 다툼의 원인은 주로 의견 대립이었어요, 저는 제 주장이 강하고 또 다른 주장이 강한 사람과는 언제나 부딪혔죠. 그렇게 줄곧 부러지기를 반복하던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에 접어들면서 제주로 떠나왔습니다. 그때 잠깐 즐겼던 취미가 있는데, 바로 춤이에요. ‘유연함’에 대한 무의식의 갈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춤추는 걸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성인이 되고는 부끄러운 탓인지 좀처럼 춰지지 않더라고요. 춤을 추면서 스스로가 나무토막 같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예전엔 꿀렁꿀렁 잘도 추곤 했었는데 본인도 알아차릴 만큼의 뻣뻣함이라니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하며 얼굴 붉힌 적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휘어질 줄 모르는 나무 같았다고 생각해요. 몸도 마음 따라 차곡차곡 쌓이고 베인 결과이겠지요. 그렇게 나라는 나무는 매번 뚝- 뚝- 부러지고 말았어요. 결국 그게 타인과의 다툼으로, 스스로의 좌절로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였어요. 제주에 와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찾고, 공부하고 또 수련하면서 몸도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봐요. 짧은 연애와 곧바로 이어진 결혼과 출산, 익숙해질 겨를도 없이 새로이 마주한 가족 구성원과 맞춰가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거기다 가족사업까지 시작 됐거든요. 그로부터 지금까지 정말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제주에서의 시간만큼은 제 자신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쉴 틈 없이 밀려오던 파도에 그만 중심을 잃은 셈이지요. 숨을 고를라치면 또, 이제 살았다 싶으면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건 제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네요. 계획은 없고 무작정 덤벼들고 보다 보니 고요함에 머물러있었던 적이 잘 없거든요.
저는 체질상 남한테 도움을 받거나 힘든 내색을 잘 못해요. 아니 과거엔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뱉어냈는데 요즘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언젠가 꼭 갚아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의 빚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경계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있어요. 나도 함부로 넘지 않고, 그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는 새롭게 관계를 맺거나 혹은 맺어진다 해도 지속되는 관계는 드물더라고요. 근데 지금 새로이 맺어진 이 관계는 가족이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가족이라는 의미와 형태가 제가 속해서 살아온 곳과는 많이 달랐어요. 물론 제주라는 이 사회와 문화도요. 여하튼 정말 작은 불씨인데도 저는 자꾸만 화르륵 타올랐어요. 벽을 허무려는 자와 안간힘으로 버티며 울타리를 쌓아가는 자의 팽팽함. 진짜 가족이라면 누구 하나 물러서면 그만일 것을, 쉽지 않았어요.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게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관계에서도 저는 정말 수차례.. 부러졌습니다.
결혼 후, 시댁으로부터 예민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제게 정신병이 있는 줄 알았어요. 원래 예민하고 감정선이 섬세하고 남들은 쉽게 넘기는 일도 쉽게 넘기지 못하는 성격 맞아요. 하지만 제주에 와서는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와서 일까요. 한동안 부딪힌 적이 없었는데 결혼하면서 아주 벌거벗겨진 기분이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을 스스로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어요. 아닌데, 나 그래도 삼십 년 허투루 살지 않았고, 다녀온 회사며 가족이며 친구들이며 나를 좋아하고 믿어준 사람들이 있는데도 새로운 가족 내에 있으면 자꾸만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타인에게는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겠고, 말하더라도 친정엄마뿐인데 아무리 털어놓아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는 게 없었어요. 엄마는 나와 다르고, 엄마의 시가는 나의 시댁과 다르니까요.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도, 심리상담사도, 친구들도.
그러다 친구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며느라기’라는 웹툰을 알게 됐어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시대가,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나는 고작 하나의 점일 뿐이구나.’
연이어 ‘b급 며느리’라는 영화를 보고서는,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닌데. 세상에는 나보다 더한 사람도 많구나.’ 하며 안도하기도 했죠. 내가, 나만 이상하고 예민한 게 아니라 생각하니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지금도 종종 마음이 외로울 땐, 타인의 글을 뒤져보며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사는 얘기에 공감도 해보고 위안도 받고 그래요. 그저 남들 사는 대로 두루두루 맞춰 사는 성격이 아닐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상하거나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니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먼저 품어주었어요. 그런데 부작용도 있었어요. ‘내가 이상하지 않다’는 관점에 서게 되니 상대에게 맞서게 되더라고요. “나는 이상하지 않아요! 당신이 이상한 거예요!” 하면서 남 탓으로 이어지기까지. 이 것 또한 완전한 해결책은 못되겠지요. 나는 부러질 수도 휘어질 수도 없으니 당신이 부러지던가! 식의 오만이니까요.
해가 거듭될수록 남편과도 점차 소원해졌어요. 친정엄마도 인터넷에도 백이면 백, 남편에게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어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그 원인이 모두 이 결혼 탓이 되고 당신탓이되는거지요. 그러면서 분노의 대상이 점차 남편에게로 옮겨갔어요. 첫 해는 시댁으로 인해 그렇게 힘들었다면 다음 해는 남편과 그렇게 부딪혔어요. 살아온 모든 고생을 씻어내주는 듯했던 아이라는 존재도 힘겨워지면서, 지금의 울타리가 자꾸만 휘청거리면서, 내가 살아온 울타리가 그리웠어요. 결혼하기 전까지는 원가정의 울타리가 그리웠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에요. 내가 살아온 환경, 내가 보고 자라온 우리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을 시어른으로 맞이한 올케들이 부러웠고, 비교할수록 내가 더 초라해졌어요. 이혼을 결심하고 무르기를 수백 번, 가족사업을 접을까 말까 고민하기를 수천번, 별거까지 갔다가 결국 아이를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세 식구를 위해 이혼 생각은 접었어요. 그럼 어떡해요, 봐야겠죠. 마주해야겠죠. 대신에 방법을 조금 바꿨어요.
도대체 이번 생은 내게 뭘 알려주기 위해 이 인연을 맺어주었을까. 그리고 조금씩 휘어지는 연습을 시작했죠. 남편이 친정에 오면, 친정에서 주로 먹는 음식을 먹고 우리 집 분위기에 맞춰 호응해 주고, 아빠 엄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듯, 나는 시댁에 가면 시댁에서 즐겨 먹는 음식을 먹고 그 분위기에 맞춰 호응하고 이야기를 듣고 또 그곳의 문화에 익숙해져야 하는 거겠지, 하며 차츰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요. 내가 뿌리내려온 땅의 토질과 바람, 온습도와 지금 적응해야 할 곳의 모든 환경이 말이에요. 나라는 뿌리와 기둥은 쉬이 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이미 곳곳으로 뻗어나가 자리 잡았고, 단단해질 만큼 굳어가고 있으니. 대신 곁가지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자애명상도 해봤어요. 실은 그 사람에게서 나를 봤거든요. 지금껏 내가 부딪혀온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을 만나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내게도 있음을 알았어요. 내 모습 중에서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부분이거나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점. 내 안의 나를 받아들인다는 마음,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그들을 용서할 것도 없고 꼭 그들을 사랑할 필요도 없다 말하면서, 그들은 그저 다른 존재일 뿐이고,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나 자신이라고 다독이면서.
겨우 그걸로 해결이 되냐고요? 맞아요. 안 돼요. 여전히 저는 마음을 다치고, 섭섭하고 외로워요. 그저 휘어져보는 과정이라고 두 눈 질끈 감고 잠깐의 시간을 견딥니다. 옹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상처 주는 존재들과는 되도록이면 눈을 마주하지 않아요. 옆에 나란히 앉지도 않아요. 이건 내가 스스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이에요. 피할 수 있다면 길가에 물웅덩이는 피해서 지나가는 것처럼요. 지금도 여전히 무례한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면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나를 내가 먼저, 제가 더욱 존중해 주려고 노력해요. 이제는 과거의 내가 아파했던 만큼 가라앉지 않아요. 발이 빠진 늪에서 자꾸만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건 내 자신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최대한 빨리 헤어 나오고 발을 씻고 바짝 말립니다. 곱씹지 않아요.
살아가는 한 끝나지 않을 여정이 아닐까 싶어요, 이혼을 하더라도 과연 해결될 일일까요? 아뇨 제 성격이 이대로라면 비슷한 상황은 또다시 등장할 거예요. 그러니 갈등도 분노도 원망도 모두 나라는 나무가 자라기 위해 필요한 자양분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뻗어나갈 수 없으면 살짝 피해서 뻗어보고, 이 길이 아니면 슬며시 휘어져도 보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한동안 제주의 나무를 사진으로 담아왔어요. 단순히 오래된 나무, 마을의 정자나무들을 담으면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요. 그러니 그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나무의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도. 몇 년이 지나고 지금,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제가 이만큼 자라 있네요. 이제와 다시 들여다본다면 어느 정도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로써 충분합니다. 지난날의 아픔은 충분히 보상받았어요. 제가 한 뼘 자랐잖아요.
그러니 지금 늪에 빠져있다면 몸에 힘을 빼고 잠시 기다려보세요. 반드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글이든 그림이든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든 혹은 잔뜩 움츠려있던 나 자신이나 그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