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을 다시 꺼내 들고 행복에 대해 야금야금 곱씹다
둘째를 낳고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첫 달은 조리원에서 나와 친정엄마와 함께, 다음 달은 산후도우미 이모님과 함께, 그리고 매일을 남편과 첫째 아이와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오늘이다. 칠십여 일쯤 되었으려나. 시간은 남의 것만 빠른 줄 알았더니 서른을 넘어서니 내 시간도 속절없이 흐른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다가, 제주에 온 지 얼마나 되었냐는 물음에 멈칫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제주로의 이주는 정말 큰 변곡점임이 틀림없는데 그간 많은 일이 있기도 했는지 손가락을 구부리지 않고서는 셈이 안 되는 게 아닌가. 2017, 2018..19, 20, 21…2…3 거울에 비친 내 눈이 동그래졌다. 7년 차라니. 그중에 어떤 날은 결혼 전의 날들이 사라지고, 또 다른 날은 결혼 이후, 출산 후의 시간들이 흐려지기를 반복하며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 제주이주 이전의 삶은 까마득해진 지 오래고.
정말 바쁘게도 살았나 보다. 제주에 오자마자 일을 구하고 사진과 글을 공부하며 사이버 대학도 다니고, 나를 연구하는 것에 골몰하던 와중에 사교댄스 취미반에서 남편을 만나 연애도, 결혼도 하고. 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작은 가게를 열어 밥벌이에 힘쓰고, 이 집 저 집, 세 번의 이사를 겪으며 또 다른 아이를 만나기까지 꼬박 6년이 흐른 것. 종종 식탁에 앉은 남편과 나는 짧은 시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모인 우리의 역사를 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한다. 말 그대로 강물이 흘러 모인 게 아니라 폭포수가 모였다 보니 마찰이 심했을 수밖에.
그저께 서귀포 하늘에는 슈퍼 블루문이 떴다. 내 보기엔 언제나처럼 휘영청 밝은 달이지만, 지금 뜬 이 달은 앞으로 14년 동안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앞으로 14년 뒤면 내 나이 마흔.. 여덟???’ 하며 고갤 돌릴 때마다 괜히 창 밖을 살피곤 했다.
“여보 이리 와봐!” 하는 남편의 부름에 달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구름 걷힌 사이로 나온 달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리 소원 빌자!” 하며 첫째도 불러 다 같이 손을 모았다. 이제 더 이상 내 소원은 ‘행복하게 해 주세요’가 아니다. 행복의 비밀을 알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오만하고, 그렇다고 지금 행복하냐 물어오면 딱히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그냥 지금, 여기가 좋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돌아보면 여전한 지금 여기다. 남편이랑 다툴 때면 지구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외로워지기도 하고,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폭발하고 나면 세상에 나처럼 미숙한 사람은 없다며 땅 속을 뚫고서라도 숨어들고 싶고, 아이가 아플 때면 작은 증상에도 ‘혹시나’하는 마음들을 더해 불안이 풍선처럼 부풀기도 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말에 상처 입기도, 나 역시 상처주기도 하며 뒤돌아서서 곱씹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기분을 살피느라 나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못하는 날도 많다. 한 주 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은 에너지는 여느 때와 같이 한방에 흥청망청 써버리고는 남은 날을 집에만 콕 박혀 폐인처럼 지내는 여전한 나와 지금 여기.
그래도 요즘 하나 달라진 걸 꼽으라면, 돈 잘 버는 법 부자 되는 길과 같은 책이 아닌 읽고 싶은 책 몇 자 들여다볼 여유, 글로 써볼까? 싶은 생각을 실현하는 열정, 툭 건드리면 불같이 타오르던 감정보다는 다소 차분해진 이성이 백분위의 우위를 점한다는 것 정도. 사실 사소한 여유라 말했지만, 치열할 땐 잊고 살았던 나라는 사람의 삶의 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
얼마 전 큰 아이가 뱉은 말 중에 자꾸 마음 쓰이는 말이 있다. “아이 힘들어, 나 너무 힘들다. 나 너무 힘들어서” 와 같은 말들. 내가 아이에게 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었을까. 쫓기듯 살아오다가 이제 좀 숨통이 트이니, 아이에게 녹아든 지난날의 내 모습들이 보인다.
“엄마 나랑 놀아줘”
-잠깐만 기다려줄래.
“나랑 놀자니까?”
-이것만 하고 잠깐만
“엄마 안아줘”
-엄마 힘들어.
“엄마 나 업어줘”
-엄마 힘들다니까 대체 왜 이래, 빨리 자 안자? 눈감고! 눈 뜨면 혼난다!
와 같은 말들. 아이는 때마다 들어온 이 말에 자주 실망하고 서글퍼졌겠지.
밥을 먹으라고 해도, 뭘 좀 도와달라 해도 힘들다는 아이 앞에서 오늘의 엄마는 요술램프 지니처럼 몸을 부풀려낸다.
“힘들긴 뭐가 힘들어!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힘들면 엄마가 도와줄게 우리 즐겁게 하나씩 해보자. 봐봐 얼마나 쉬워 하나도 어렵지 않아!”
단단한 목소리에 과장된 몸짓을 더한다. 이미 아이에게 각인된 ‘힘듦’을 풀어내기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를 일이지만, 내가 흘려 생긴 얼룩이니 열심히 지워볼 수밖에.
다소 여유로운 나날들 속에 꼬물거리는 둘째 아이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아이가 물질이 되어 지금 내 품에 와있는 걸 보면 매번 새롭다. 탯줄과 태반에 의지해 살았던 시간을 지나 지금, 내 젖가슴을 물고 켁켁대는 아이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하루하루 나날이, 손톱이 자라고 살이 오르는 아이를 보면서 아.. 내가 보지 못하는 몸속에서는 밥 먹을 준비도 해야 하고 뒤집을 준비, 걸을 준비도 해야 하니 얼마나 애쓰는 중일까 싶어 마음이 아리기도 한다. 작은 아이의 이토록 치열한 하루하루를 앞에 두고, 내가 무엇이 힘들다 말할 수 있을까. 크든 작든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의 행복 타령이 지겨워, ‘행복’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삭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뜻을 바꾸든지. [행복 : 음식이 소화되지 않아서 배에 가스가 차는 것을 뜻함] 하지만 얄팍하게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낱말 자체는 결백하다는 것을 안다. ‘행복하기 싫다’는 내 말은 정확히는 ‘행복을 목표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승진’ ‘결혼’ ‘내 집 마련’ 등과 동의어로 여기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내 손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언제 행복했던가. 불안도 외로움도 없이, 성취도 자부심도 없이, 기쁨만 기뻤던 때가 있었던가.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 “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 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시와 산책, 한정원]
우연히 머리를 볶으러 미용실에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고, 기다리는 동안 꺼내볼 책을 하나 골라 집을 나섰다. 좋은 문장이니 다시금 곱씹고 싶다며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펼치게 된 날, 이 구절들을 읽고서 다시금 달 앞에 두 손 모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단순하게 소원의 내용이 달려져서라기보다는, 나의 지금 여기와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귀한 물꼬가 되어주었기에.
달이 나날이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듯, 오늘은 행복이 이만했고 불행이 저만했구나 생각하고 말기를. 오늘은 손톱달이지만 곧 보름달이 될 거란 희망, 지금은 가득 찬 달이지만 점차 줄어들 거라는 기대를 품고 무수한 밤들을 보내기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달의 뒷면이 있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그런 거 아니겠냐며 무심하게 넘기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기분 좋은 에너지를 모으고 쓰고 또 모으고 쓰기를 반복하며 다음 슈퍼블루문이 뜨는 밤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