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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Jan 09. 2021

#5. 첫 직장과 첫 상사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데 난 실패했었다.

직장 생활에서 '첫'이라는 글자가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두번째 회사로 가는 과정에서 '첫 직장'이 갖는 비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얼마나 했는지 등을 보기 때문에 첫 회사에서 어떤 역할, 어떤 생활, 어떤 능력을 키웠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첫 직장이 탐탁치 않을 경우 다시 신입으로 회사에 지원해 입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 첫 회사는 정말 최악 중 최악의 회사였지만 나는 지금도 이력서상 가장 하단이 그 회사로 시작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단 첫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단순히 없던 걸로 하기엔 짧지 않았고 굳이 지우고 싶은 마음까진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도 종종 내게 진로 상담이나 첫 회사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토로할 때면 "첫 직장은 잘 들어가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잘 들어간다는 게 꼭 대기업이나 좋은 연봉의 회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학창생활의 모든 면들이 회사 입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면 첫 직장은 이제 본격적인 사회인으로의 첫 걸음이자 앞으로 해당 분야에서 쭉쭉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드는 단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벌써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 그 상사는 내 이름조차 기억 못할 것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 상사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생김새도 잘 알고 있다.

만약 흐른 시간만큼 얼굴의 변화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난 그 상사를 길에서 마주쳐도 바로 알아 볼 수 있다.

내가 그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만큼 짜증났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첫 회사에 처음 출근하던 날.

내 상사는 나보다 약 10년 넘는 나이 차이를 지닌 남자였고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으며 평범한 여성의 남편이었다. 딱 보기에도 까칠해보이는 외모에서 나는 그와의 시간이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음 날부터 100% 적중했다.


지금과는 굉장히 사회적 분위기와 인식이 달랐던 시대이니만큼 감안해서 읽었으면 좋겠다.

그때만 해도 직장생활은 다 그런 것이며 그런 혹독한 과정을 슬기롭게 극복해야만 좋은 사회인, 훌륭한 인재로 거듭난다고 배웠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으며 마치 그것이 자신도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 오늘 날 마치 뭐나 된 양 떠드는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외국 생활을 했던 탓에 나는 틀에 짜여진 환경을 꽤나 싫어했지만 내색하는 타입은 아니였다.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스타일이 존재하는 것이 사회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이 조직에서 막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내색할 수도 없었지만 내색할 마음도 없었다. 그냥 1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 역시도 그들과 융화될 것이고 순리대로 다 될 줄 알았다.




개인 심부름, 다른 동료들과 잡담 금지..창살 없는 감옥의 시작


당시 난 또래들보다 군대를 더 빨리 다녀왔기 때문에 인내심에 있어서는 꽤나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군대까지 갔다와서 애도 아니고..."라는 인식이 강한만큼 조직에 순응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첫번째 노력이라 생각했었다.

상사는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내 표정, 옷차림새, 심지어 색상까지도 트집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너 제 정신이냐?"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간섭과 관여를 해왔다.


그 중 개인 공과금 심부름도 있었는데 정말 황당한 것은 차라리 은행에 가서 대기하는 그 시간이 더 즐거웠다는점이다. 상사 얼굴을 안봐도 되니 말이다. 그는 내게 아무런 스킬이나 업무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알아본다며 뜬금없는 문서 작업을 시켰고 그것의 제한 시간은 1시간이었다. 나름대로 두뇌를 가동시켜 문서를 작성했지만 이미지를 삽입하면 이미지를 넣는다고, 타이핑으로만 작성을 하면 보기 어렵다고 트집을 잡았다. 정말 당시에 얼마나 트집이 기가 막혔는지 타파트장이 듣다 못해 한 마디 거들기도 했다.


" 아니. 그러면 닥달만 하지 말고 직접 보여주시던가. 듣다보니 황당하네요. 그 직원더러 어쩌라는 거야? "


실제로 받아 본 그의 작업 문서는 진짜 당시 신입에 가까운 내 눈에도 형편없었다. 그래도 난 참았다.

하지만 3개월이 넘도록 달라지는 건 없었고 오히려 점점 더 간섭이 심해졌다.

다른 파트의 직원들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뭐라고 했고 9시까지 출근이었지만 나는 8시까지 출근해 사무실 청소를 해놓도록 했다. 심지어 퇴근도 자신이 하기 전에는 할 수 없었다.

서서히 내 인내심도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고 타파트에서도 "차라리 회사를 옮기는 게 어떠냐?"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상사의 악행은 끝이 없었다.






상사에게 대들다, 그리고 상사의 해고를 요구하다


인내심 갑인 줄 알았던 내가 드디어 분노를 표출하는 사건이 터졌다. 1년이 지나 연봉이 다시 책정되는 시기.

나는 여전히 막내였기에 내 연봉은 오롯이 팀장이던 상사의 재량에 맡겨졌었다. 힘들게 외부 미팅을 하고 돌아오는 길..."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겠지."라는 기대감도 잠시, 상사가 날 휴게실로 불렀다.


" 네가 그 동안 고생도 했고 다 아는데, ~~~ 이렇게 결정했다. 1년만 더 버텨봐. "


순간 머릿 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ㅈㄹ맞은 일을 1년이나 더 견디라고?

자리로 돌아와 대충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고 퇴근을 하려는데 상사가 "벌써 가?"라고 날 붙잡았다. 슬쩍 그를 바라보니 창문에 비쳐진 그의 모니터가 보였는데 게임을 하고 있었다. 


" 보고서 제출했는데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

" 야. 보고서 아직 검토 안했는데 어딜가? "

" 그럼 게임하지 말고 얼른 보시던가요. "

" 뭐? "


그때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에 있던 회사 다이어리를 상사의 책상으로 내던졌다. "너 따라나와. XXXX! "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일어선 상사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난 오늘 부로 이 거지같은 회사 관두고 나갈테니 월급 안줘도 된다. 더러워서 안 받겠으니 대신 계급장 내려놓고 남자 대 남자로 한판 붙자고 했다. 그냥 나가긴 도저히 열받아서 너라도 두들겨 패고 나갈 것이라 말하니 그렇게나 악독같이 굴던 상사가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일은 밖으로 뛰어나온 타 파트 직원들에 의해 무산됐고 다음 날 출근한 나는 상사에게 인사도 없이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상사 역시 아무 말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고 곧 임원진듥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부당함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서 급여 원상 복귀와 상사에 대한 인사 조치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의 해고를 요구했고 그는 1개월 동안 퇴직 기간을 적용받게 됐고 그는 끝내 해고 당했다. 




나는 그 회사를 나온 후 다른 개발사로 입사를 하게 됐고 사실상 기획에 대한 업무를 그 곳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워낙 첫 회사에서 제대로 배우질 못해 신입은 아니였지만 신입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게 되는 건 내 몫이었다. 따지고보면 두번째 회사 이후로 일이 잘 풀려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업무 능력은 회사에서 시간만 보낸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상사와 선배의 노하우를 제대로 이어받아 본인만의 노하우로 승화하는 계기도 있어야 발전도 할 수 있다.


나는 첫 회사 이후로 동료나 상사와 마찰을 빚은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인내심의 갑이었기 때문에 잘 어울려 일을 해왔고 지금도 그것은 유효하다.

내가 화를 낼 때는 딱 하나...급여일에 급여가 안 들어왔을 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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