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음악의 틀을 넘어 인간 중심의 음악을 만들다
앞선 글에서 재즈를 자유와 개성 그리고 일탈의 음악이라고 했는데, 사실 재즈보다 200년 이상 전에 이렇게 자유와 일탈을 추구한 음악이 있습니다. 바로 바로크 음악입니다.
*바로크 음악(Baroque) : 르네상스 이후인 1600년 경부터 바흐(J.S.Bach)가 사망한 1750년 정도까지의 유럽 음악의 사조를 일컬음. 찌그러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barroco' 에서 따왔음.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서양음악사에서 바로크는 가장 옛시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라고 하면 틀에 박힌 음악과 연주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긴 형식을 강조하는 고전주의보다도 선시대의 음악이었으니 더 그렇죠. 하지만 이는 정말로 오해와 편견에 가깝습니다.
바로크 이전 시대에도 음악이 분명히 존재했는데 바로 르네상스 시기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음악은 사실 '르네상스' 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전혀 휴머니즘 성향이 부족했습니다. 중세 음악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음악은 교회에 거의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악기의 개발도 부족해서 대부분이 성악 합창곡이었고 화성이나 음계·템포 등은 지극히 단조로웠습니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 중심적인' 자유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음악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성악이 아닌 기악곡들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전의 문법과는 다른 화성과 음계·템포가 과감히 시도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재즈의 일탈에 비견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음악의 문법이 교회 음악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거부했다는 것은 거의 신성 모독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음악가인 장 자크 루소(J.J.Rousseau)는 저서 <음악 사전(Dictionnaire de musique)> 에서 '바로크' 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면서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한 혼란스럽고 억지스러운 음악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로크가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고 자유로움과 일탈을 추구한 것은 바로 음악의 중심에 '인간' 을 놓기 위한 휴머니즘적 시도라고 봐야겠습니다. 사실상 음악에서의 르네상스는 바로크 시대였던 것이죠. 나아가 바로크를 직접 가서 들어 보면 오히려 고전주의 이후 음악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느낌까지 듭니다. 고전주의 음악에 들어와서는 음악적 형식이 공식처럼 만들어져서 되레 음악가들의 자유가 줄어들었고 그래서 베토벤(L.V.Beethoven) 이후에는 낭만주의 음악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낭만주의 음악(Romanticism) :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내는 낭만주의적 사조에 따랐던 19C 유럽의 음악을 일컬음.
바로크가 자유로운 음악인 또 하나의 이유는 대부분 실내악 규모에서 연주되기 때문입니다. 실내악(chamber) 은 10명 이내의 소규모로 연주하는 기악 합주곡을 말합니다. 보통 3~5명 정도가 일반적인데 현악 4중주와 피아노 3중주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기악곡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실내악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내악도 역시 재즈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한 룰 없이 연주자들끼리 모여 같이 연주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재즈만큼 자유롭게 구성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연주자들을 모아 실내에서 합주 연주를 했던 것이 바로 실내악인 것이죠. 물론 당시 대규모의 연주자를 일시에 동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현실적 여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고요.
그래서 가장 눈에 띄는 실내악의 특징은 '협주(concerto)' 가 아닌 '합주(ensemble)'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협주라는 것은 독주자(soloist) 중심으로 나머지 연주자들이 서포트하는 그런 개념인데, 합주는 그와 달리 그저 여러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연주한다는 개념입니다. 주 선율·보조 선율 같은 주종 관계가 원칙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실내악단 중 하나인 '이 무지치' 가 대표적입니다. 뜻 자체부터 그냥 '연주자들' 입니다. 지휘 없이 그냥 연주자들끼리 모여서 같이 연주하는 것이죠. 이렇게 실내악 형식으로 연주되는 대부분의 바로크 음악들이 이런 특징을 그대로 갖습니다.
*이 무지치(I Musici) : 1952년 창설된 이탈리아의 실내악단으로, 1959년에 녹음한 비발디(A.L.Vivaldi) 의 <사계(Le Quattro Stagioni)> 가 천만 장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둬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바로크 음악의 특징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Basso continuo' 가 있습니다. 주로 쳄발로나 오르간 등 건반악기의 왼손이 담당하는 성부인데, 아래 그림처럼 악보에 숫자 등을 표시해서(figured bass) 이것에 맞게 오른손 등이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Basso continuo(통주저음; 通奏低音) : 저음 파트에서 지속적으로(continuo) 베이스 반주를 넣어주는 연주 기법. '통주저음' 은 일본식 표현으로, 원래의 의미대로 '지속저음' 또는 '계속저음' 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함.
그림을 통해 좀더 상술하면, 악보에는 똑같이 밑음(근음)이 도(C3)로 그려져 있지만 함께 적혀 있는 숫자에 따라 화음이 달라지며 그 화음을 기반으로 오른손이 즉흥 연주를 하게 됩니다.
- [A] : 아무런 숫자가 없지만 이는 3과 5가 생략된 것으로, 3도 위인 미(E3)와 5도 위인 솔(G3)과 함께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요즘 쓰는 화성 코드로 말하면 'C' 가 됩니다.
- [B] : 숫자 6이 같이 쓰여 있는데 이는 6도 위인 라(A3)를 뜻합니다. 역시 3이 생략된 것으로서 미(E3)와 라(A3)와 함께 연주하라는 뜻이고 화성 코드로는 'Am/C' 에 해당합니다.
- [C] : 숫자 7은 7도 위인 시 플랫(Bb3)을 뜻하며 여기에는 3과 5가 생략된 것입니다. 미(E3)·솔(G3)·시 플랫(Bb3)과 함께 연주하라는 뜻이고 'C7' 에 해당합니다.
- [D] : 숫자 4와 6은 각각 4·6도 위인 파(F3)와 라(A3)를 뜻하며 코드로는 'F/C' 에 해당합니다.
- [E] : 숫자 7과 # 표시가 있는데 각각 7도 위인 시 플랫(Bb3)과 3도 위에서 반음 올림(#)한 파(E#3=F3)를 뜻하며, 역시 5가 생략된 것으로 솔(G3)도 포함합니다. 코드로는 'Csus7' 이 됩니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는 아예 (정형화된) 화음 코드를 적어 넣기 때문에(예- Cm7) 아무런 고민 없이 해당 코드를 연주하면 되지만, Basso continuo 의 경우에는 악보에 적힌 밑음과 조표를 고려하여 함께 쓰인 숫자 등을 상대적으로 판독해야 하는 것이어서 훨씬 난도가 높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다성 음악과 대위법도 많이 쓰이던 시절이어서 즉흥 연주 시에 다른 파트 악기가 연주하는 선율을 따라가거나 변형시키기도 했는데, 그러면 머릿속에 두 개 이상의 멜로디를 그려가며 거의 왼손 오른손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다시피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Basso continuo 까지 디코딩해가며 즉흥으로 연주를 하는 것은 오늘날의 재즈의 즉흥 연주보다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성 음악(polyphony) : 둘 이상의 독립된 성부가 동시에 연주되거나 노래되는 것. 주선율과 화성적인 보조선율(반주)로 이루어지는 화성 음악(homophony)과 구별됨.
*대위법(counterpoint) : 둘 이상의 독립적 선율을 활용하여 이들을 조화시켜 만드는 작곡·연주 기법. 같은 선율을 시간 차를 두어 연주하는 것인데,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카논(Canon)이 되고 여기에 화성까지 고려하여 음을 바꿔 연주하면 푸가(Fugue)가 됨.
이러한 Basso continuo 는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작곡가가 직접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으면서 사라졌습니다. 작곡가의 지시에 따라 연주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연주자가 작곡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했던 것입니다. 마치 현대의 재즈 즉흥연주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