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4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y 문성 Moon song Kim

4. 한낮에도 덥지 않았다.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 꽂히는 게 아니라 살며시 내려앉았다. 공기 속에 녹아들어 눈이 닿는 것마다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길과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대로변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깨닫기는 충분했다.


파란 하늘이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고 노란 낙엽이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위에 쌓이고 쌓여 무채색에 가까운 풍경 속에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못 본 척 무시하려고 애를 써도 무시하기는커녕 넋을 놓고 바라보기 일쑤였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속에도 그가 있었다. 골목길 모퉁이 빨갛게 익은 감나무 아래 그가 서 있었다. 크게 말다툼하고 난 다음날 아침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나를 기다렸다.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큰 길가 담벼락의 울긋불긋한 담쟁이넝쿨 아래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들어가는 걸 보고 가겠다며 먼저 들어가라고 채근했다.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는 지하철역을 그대로 지나쳤다. 가라는 말도 가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고 걷기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나란히 걸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순간들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발을 뗄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내딛는 걸음걸음 가슴이 저며 들었다.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지칠 대로 지쳐 어서 빨리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방금 전까지 무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노곤하다 못해 정신이 몽롱해져 있었다. 자다가 깬 엄마나 늦게 퇴근한 언니와 마주쳐 아르바이트 거리를 찾고 공부를 하다 왔노라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나면 정말로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며 아르바이트 거리를 찾고 열람실에 앉아 영어책을 들여다보다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불속에 누워 눈을 감으며 온몸이 뻐근한 게 그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나 보다 뿌듯할 지경이었다.


냉기가 목덜미를 휘감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창문부터 쳐다봤다. 간밤에 닫는다는 게 끝까지 닫지 못하고 말았는지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좁은 틈새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새파란 빛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끝까지 다 열어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다만 파랗디 파란 하늘이었다. 선명한 그 빛깔에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눈을 돌리지 못하고 빠져들어 있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얼른 창문을 닫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골목길을 벗어나기도 전에 몇 번이나 멈춰 섰다. 마음을 다잡고 큰길로 접어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걸음이 느려지다가 지하철 역 앞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계단을 따라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서도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충동적으로 지하철에 올라탈 때까지 내내 학교의 가을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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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 서면 인문대까지 쭉 뻗은 오르막길 양옆으로 은행나무가 줄지어 노랗게 길을 밝혔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로 은행잎이 흩날렸었다.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밟을 때면 사각사각 소리가 났었다. 속삭이는 듯 들리는 그 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은행잎이 쌓인 곳만 골라 걸었었다. 인문대 쪽으로 고개를 들면 온통 붉었었다. 인문대 내정의 단풍나무와 벚나무도, 인문대 건물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도, 건물 너머 산자락까지도 붉게 물들고 있었더랬다.


내정 구석 벤치에 앉으면 인문대 내정부터 산자락까지 한눈에 들어왔었다. 형형색색 단풍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었다. 그 화려함에 어지러워 고개를 젖히면 파란 하늘이 펼쳐졌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것 같이 가깝다가도 아무리 높이 손을 뻗는다 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아득했었다. 그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이면 그 자리를 떠나질 못했었다. 수업도 빼먹고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하염없이 앉아 있노라면 어김없이 그가 나타나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었다. 그 뒤로도 오래도록 나란히 앉아 가을을 즐기곤 했었다.


어쩌면 그곳에 앉아 있는 그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경멸해마지 않을까. 예전처럼 씩 웃으며 나를 반겨주지는 않을까.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학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따라 가슴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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