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5. 마을버스에 타고나서야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버스 안에 앉은 사람들 태반이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녀였다. 입구에서 멈칫하는데 때마침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하고 쐐기를 박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학교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학교를 거쳐 산을 오르려는 등산객 아니면 기숙사에 돌아가는 학생뿐이었다. 그와 마주칠 가능성은 사라지고 있었다.
뒤에서 어깨를 밀쳤다. 잔뜩 인상을 쓴 아저씨가 입구를 막고 있던 나를 째려보며 지나쳤다. 이어서 올라타는 사람들을 피해 비어 있던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바로 버스가 출발했다. 모퉁이를 돌고 언덕을 오르며 차체가 요동을 쳐댔다. 버스가 급정거를 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실망하고 있는 건지 안도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버스가 학교 앞에 도착하자 모두들 서둘러 내려 길을 떠났다. 정문 앞에서 산 중턱까지 사람들의 행렬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 멍하니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가 마지막 일원이 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학교는 내가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학생보다 등산객이 더 많다는 것 빼고는. 사람들 대부분이 곧바로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문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정을 지나 건물 오른쪽 구석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정 화단을 비추고 있었다. 화단의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이제 막 물들고 있었다. 노랗고 붉은 잎들이 그 잎들 사이로 번지는 햇살과 더불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아버렸다.
언젠가 눈을 떴는데 그가 서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며 씩 웃는 그 얼굴에 나도 따라 웃었다. 나란히 앉아 단풍 너머로 해가 지는 걸 지켜봤다. 단둘이 어둑한 교정을 걸어 내려갔다. 그날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는 춥다고 투덜대는 나를 모른 척하는가 싶더니 슬며시 내 손을 쥐었다. 당황해서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고는 단풍이 들었냐고 놀려댔다. 혼잣말하듯 이렇게 오래오래 걸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눈을 떴다. 단풍이 여전히 햇살 속에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해가 조금씩 단풍나무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예전과 같았다. 나만 예전과 같지 않을 뿐. 어두워지기 전에 벤치에서 일어섰다. 해가 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자리에 혼자 앉아 해가 지는 걸 지켜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화단을 지나 내정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내려가 정문 앞 버스정류장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숨이 턱밑까지 차서 헐떡거리며 막 정류장을 떠나려는 버스를 잡았다.
정문 앞 정류장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늦어지면 지하철역까지 손을 맞잡고 고갯길을 넘었다. 서로를 바래다주겠다는 핑계로 막차시간이 다 될 때까지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한 번은 불 꺼진 가게 앞에서 키스를 하는데 갑자기 안에서 불이 켜졌다. 놀라서 도망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길거리에 멈춰 서서 배를 잡고 웃어댔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은 버스가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줄기차게 나를 따라왔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내내 나를 붙잡고 또 나를 떠밀었다.
집 앞에 섰을 때는 해가 다 지고 난 뒤였다. 어두운 골목 탓인지 집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유독 눈부셨다. 거실 창문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TV 소리도 흘러나왔다. 발길을 돌렸다. 동네를 배회하며 거실에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었다. 더듬거리며 대문과 현관을 열고 거실을 지나 방에 들어와서도 방문을 잠그고 나서야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면서도 줄곧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덮어두고서라도 그가 보고 싶었다. 그냥 그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깜깜한 어둠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다를 바 없었다.
다시 아침이 오고 다시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스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해버렸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길 한복판이라도 그렇게 피해버리고 나면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더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족도 신경 쓸 필요 없는 그 자리가 내 방보다 더 편안하게 여겨졌다. 때때로 고맙기마저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게 그래서 아무것도 낙담할 일이 없으리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