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불면증
4. TV를 껐다. 순간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소파를 짚고 일어나 발을 디뎠다. 비척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방안의 물건들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했다.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흡사 유령들 같았다. 눈을 감아버렸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렸다. 째깍째깍.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째깍째깍. 여태껏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째깍째깍.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위이이이잉. 우렁찬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청소기를 돌리는 엄마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내가 핏발 선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맞은편 벽에 붙은 타일들이 촘촘했다. 작은 동그라미 무늬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멍하니 타일을 쳐다보다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엄마도 청소를 끝내고 외출했는지 온 집안이 조용했다.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 안으로 기어들어 몸을 웅크렸다. 이불 끝자락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커튼 틈새로 햇살이 새어들고 있었다. 빛을 받은 먼지들이 반짝거렸다.
눈을 끔벅였다.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방안이 어둑했다. 철커덕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거실을 지나는 발자국 소리.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 엄마가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의자에 걸린 코트를 대충 걸치고 부엌으로 갔다.
“다녀왔어요.”
싱크대 앞에 선 엄마 등에 대고 말했다.
“일찍 와 있었네, 저녁은?”
엄마 목소리가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에 묻혔다.
“오는 길에 먹었어, 배고파서.”
엄마의 시선은 물살에 흔들리는 상추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 먼저 들어갈게요.”
엄마는 여전히 상추 씻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피곤해서 일찍 좀 자려고.”
혼잣말하듯 이야기하고 돌아섰다.
“그래라, 그럼.”
대답을 들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방문을 잠그고 코트를 벗어 책상 쪽으로 던지며 이불 위에 털썩 누웠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흐릿했다. 윤곽이 차츰 사라졌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몇 번인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가 TV를 틀었다. 방문 너머 들리는 소리가 뉴스를 전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뉴스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소리가 뭉개져 둔탁하게 웅웅대고 있었다. 차츰 작아졌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아득했다. 싱크대 앞에 서 있던 엄마의 뒷모습, 화장실 타일의 동그란 무늬, TV너머 나를 쳐다보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환한 얼굴. 하루가 꿈속의 장면들처럼 조각나고 건너뛰며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엄마의 뒷모습보다 어젯밤 TV에서 본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이 더 생생했다. 들릴 듯 말 듯 이어지는 뉴스 소리보다 죽어도 좋아 나지막이 고백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또렷했다.
헤어지자 말하던 그의 목소리도 나직하고 또렷했었다. 또다시 우리를 어젯밤 그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함께했던 순간들을 이제는 그들처럼 함께할 수 없는 순간들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잡을 새도 없이 흘러갔지만 그와의 순간들은 여전히 내 앞에 멈춰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그와의 순간들을 곱씹고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 고통스러우면서도 황홀했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난 뒤 피곤에 절은 몸이 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엇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곤해져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가슴이 뻐근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에게 몰두하다 보면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를 놓아선 안 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 고행으로 믿음을 구하는 수도승이라도 된 듯이 굴고 있었다. 내 안에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유일한 일과라면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