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불면증
3. 날이 갈수록 잠이 줄었다.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더니 급기야 밤을 꼬박 새우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밤이 되면 잠을 대신해 불안이 밀려들었다. 어둠 속에 들리는 거라곤 모두가 잠든 가운데 나 혼자 깨어있다는 걸 환기시켜주는 시계 소리뿐이었다. 째깍째깍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기계음이 나를 괴롭혔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도 집요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박자에 맞춰 내 안 어딘가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더듬더듬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TV를 틀고 소리를 줄인 다음 화면을 지켜보다 채널을 돌리고 다시 화면을 지켜보다 채널을 돌렸다. 한밤중에 하는 TV 프로그램은 스포츠 게임이나 한물 간 영화 아니면 연예오락 쇼 재방송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지켜봐도 감흥이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채널을 돌리고 새로운 영상을 눈으로 좇다 보면 방금 전에 무얼 보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이 따갑다 못해 시려올 즈음이면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누가 일어나기 전에 TV를 끄고 다들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앞에서 나갈 채비를 하는 척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누우면 비몽사몽간에 하루가 갔다.
또다시 어둠 속을 더듬어 소파에 앉았다. 손으로 탁자를 훑어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켰다.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었다.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총을 쏘고 사랑을 나누고 게임을 하고 물건을 팔았다. 화면이 쉬지 않고 움직이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채널 돌리기를 멈추자 암전이 끝나고 천천히 자막이 나타났다. “죽어도 좋아!”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기 있었다. 하늘 가까운 산꼭대기 그들만큼이나 낡고 자그마한 집이 둘만의 보금자리였다. 집을 나서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에게 의지해서 한 걸음씩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볼일도 보고 시장 구경도 하고 동네 사람들도 만나고 다시 비탈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두 손을 보며 리모컨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화면 너머 나를 보고 있었다. 긴 시간 많은 굴곡을 겪어왔음을 짐작케 하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소일거리나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서로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했다. 무엇도 이룰 필요가 없다고 함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화면에서 그들이 사라지고 자막이 올라가고 암전이 광고로 바뀌고 나서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너지는 게 싫다고 했었다. 그도 죽을 날을 기다리다 날 만났다면, 이뤄야 할 게 없었다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랬다면, 떠나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함께 했으리라는 결말보다는 떠나고 말았으리라는 결말이 더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저들도 우리처럼 둘 중 누구 하나는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으리라고 결국엔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리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들처럼 죽을 날을 기다리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무엇도 이룰 필요 없이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도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았다. 아니면 차라리, 그가, 죽어도 좋았다. 나 아닌 누군가와 만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욕심이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기는커녕 끌려 다니고 있었다.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욕심이 나를 부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원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욱더 그를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