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망히

7장. 장면과 장면 사이

by 문성 Moon song Kim

2. ‘기말’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후려쳤다. 눈이 달력을 찾아 방안을 훑었다. 책상 위에 손바닥만 한 탁상용 달력이 보였다. 빨간 바탕에 하얀 눈이 쌓인 초록색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설마 하며 손을 뻗어 달력을 잡아챘다. 의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림 아랫부분에 선명한 검은색으로 숫자 12가 박혀 있었다.


날짜와 요일을 확인해보려다 망연자실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도 엊그제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력을 내려놓고 점퍼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버튼을 누르자 폴더 앞면의 액정화면이 깜박였다. 2시 27분. 아래 작은 글씨가 오늘이 12월 3일임을 알리고 있었다.


황망히 일어나 이불과 요를 개서 한쪽 벽에 쌓았다. 방 안을 둘러보며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휴지로 대충 방바닥을 쓸었다. 방바닥에 남아 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줍는 것까지 하고도 순식간에 정리가 끝났다. 방바닥엔 내 물건만 남아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휴학생이었다.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고 방안을 샅샅이 살폈다. 아직 정리할 게 남았는지 찾고 또 찾았다. 방바닥을 한 번 더 꼼꼼히 닦고 이부자리도 한 번 더 매만져 단정하게 정리하고 나자 더 이상은 하고 싶어도 할 게 없었다. 이부자리와 책상 사이 비어 있는 좁은 공간을 채우듯 몸을 밀어 넣어 쭈그리고 앉았다. 햇살이 물러나 내가 앉은자리에 벌써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책장에 전공서적과 수업교재 그리고 소설책과 발라드 시디 몇 장이 키순으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책상에 책과 노트, 달력, 연필꽂이, 메모지도 선을 맞춰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랍장위 화장품이나 목욕용품 따위 잡동사니까지도 종류별로 크기별로 줄지어 있었다. 옷장 안도 냉장고 안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리란 걸 열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안의 모든 게 미정이다웠다. 미정이의 취향과 규칙대로였다. 여기에 앉아 있는 게 미정이만의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어려워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의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에도 이런 기분이었더랬다.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가 잠깐 나가기만 해도 금세 방이 낯설어졌었다. 그가 없는 방은 그가 있을 때보다 몇 배는 커 보였었다. 붙박이 책상과 책장에 옷 몇 가지와 이부자리 외에는 세간이 거의 없는 단출한 방이 그 어떤 세계보다도 커 보였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게 창문 어딘가 보이지 않는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일어나 창문을 꼭 닫고 그 김에 옷가지를 주워 들고 방을 나섰다. 계속 눌러있을 수는 없었다.


방문들이 양옆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어둡고 좁은 복도를 지나 현관에 섰다. “다 함께 쓰는 공간 조용히.” 주의가 적힌 종이가 붙은 현관문 앞에 서서 숨을 죽이고 신발을 찾아 신었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나와 다시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대충 꺾어 신었던 신발을 고쳐 신고 반지하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갔다.


건물 현관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 때문에 유리로 된 출입문이 보이질 않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둑한 지하에서 올려다보는 눈부신 그 모습이 이곳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저 문밖으로 나가면 여기와는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계단을 오를수록 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얼굴로 가슴팍으로 온 몸뚱이로 쏟아져 내렸다. 빛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다시피 하고 현관 앞에 섰다. 끼익 쇳소리와 함께 문을 밀자 찬바람이 달려들어 눈이 번쩍 뜨였다.


맞은편 건물 창문에 태양이 반사되어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번쩍거렸다. 창문을 막고 있는 갈색 알루미늄 창살도 반짝이며 금속성 광택을 냈다. 그 아래 벽돌 몇 장으로 쌓은 얕은 화단에 키 작은 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심어놓은 어린 나무들이 미처 자라지 못한 채 시들고 있었다. 말라붙은 이파리 몇 개만 달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이 햇살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무들 뒤로 드러난 시멘트벽은 더욱 볼품없었다. 오래된 시멘트 벽에 새로 덧바른 시멘트 자국이 지저분하게 도드라졌다. 갈라진 틈새를 메우려고 덧바른 자리도 갈라져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삑삑삐익. 전자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건물 현관문이 열리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가 나왔다. 막 머리를 감았는지 젖은 머리칼을 털다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총총히 골목을 벗어나 오가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학교 앞 자취 골목일 뿐이었다. 찬바람에 부르르 떨며 점퍼를 여몄다. 나도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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