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7장. 장면과 장면 사이

by 문성 Moon song Kim


IMG_1894.JPG

5. 우리는 헤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걷고 있었다. 어둑해진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간판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두세 걸음 앞에 노란색 간판 다음에는 몇 집 건너 파란색 간판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 뒤에 있는 가게에 매달린 붉은 등도 은은하게 빛을 뿜고 그 맞은편 간판에 촘촘히 박힌 알전구도 빨간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초록색으로 반짝거렸다. 으슥하던 골목이 화려한 불빛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어둠 속으로 번지는 불빛들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낮에 그 초라하던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나도 정수도 반사적으로 멈춰 서서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호프집 간판 아래에 달아놓은 스피커가 울리고 있었다. 스피커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쿵쾅거리는 소리밖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 발 더 다가섰다. 온몸을 울리는 소리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무작정 호프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프집 안이 바깥보다 어두웠다. 칸막이로 나누어놓은 자리마다 달린 등이 테이블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구석자리로 들어가 앉으니 정수도 어슬렁어슬렁 따라 들어왔다. 노래가 하나 끝나고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고 나서야 종업원이 나타났다. “오백 두 잔이요”하고 메뉴판을 건네기도 전에 주문하자 정수가 “안주는 조금 이따 주문할게요”하고 거들었다. 종업원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주문을 받아 적고 사라졌다.


종업원이 다시 나타나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두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이 오싹했지만 그래도 잔을 놓지 않았다. 목을 훑는 알싸한 느낌이 좋아서 숨이 막힐 때까지 술을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정수도 내 잔을 곁눈질하며 조금 더 들이켜 양을 맞추고 나서야 잔을 내려놓았다. 또다시 술로 대화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실은 정수가 잔을 부딪치든 말든 술을 마시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술을 넘길 때마다 눈을 감고 숨을 멈췄다. 술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만큼은 모든 게 아득해졌다. 나까지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몇 번 넘기지도 않았는데 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한 잔으로는 부족했다.


“한 잔 더 할래?”


눈으로 종업원을 찾으며 정수에게 물었다.


“누나, 나도 들었어요.”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대답 아닌 대답에 정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알아요? 사람들이 누나 폐인 됐다고 그러는 거?”


정수가 볼멘 목소리로 되물었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혀까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누나 혼자 헤매고 있대요. 다들 잘 지낸다고요. 누나만 괜찮으면 돼요, 누나만 괜찮으면,”

“인우, 인우도, 잘……, 지내?”


정수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낚아채고는 더듬거리고 있었다.


“인우 형도 잘 지내요. 예전이랑 똑같다고요.”


내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교도 잘 다니고 집에서도 잘 지내고. 근데 가끔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더라고요. 조용해서 자나보다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면 다 마신 맥주캔 같은 게 나와 있고 그러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가 했는데 물어보기도 뭐하고, 원래 형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말 붙이기도 어려운 스타일이잖아요, 다음날이면 또 아무렇지도 않고, 계속 지내다 보니까 습관인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그러다 알코올 중독자 된다고 구박해도 꿋꿋이 마시더니 요즘엔 너희도 동참하라고 꾀고 있어요. 형 때문에 우리도 술이 늘었다니까요.”

“우리?”

“아……, 누나 몰랐어요? 우리 같이 살아요. 인우 형이랑 진욱이 형이랑 나까지 셋이서. 여름에 방 구하러 다녔거든요. 지난번 집이 학교에서 너무 멀고 불편한 것도 많아서. 진욱이 형도 기숙사가 답답해서 나온다고 해서 같이 보러 다니는데 괜찮은 집이 있더라고요. 방도 두 개고 부엌도 딸려있고 해서 덥석 물었죠. 나중에 인우형도 들어오고. 셋이 나누면 더 싸니까. 마을버스 종점 알죠, 누나, 거기 왼쪽 골목 끝에 있는 집이에요. 반 지하라도 거기 지대가 높아서 일층 같은 반 지하거든요. 한 층을 우리가 다 쓰고 현관도 따로 있고, 그만하면 꽤 괜찮지 않아요?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요. 지난번 집은 학교에서도 멀지 정류장에서도 멀지 진욱이 형도 와서 보고는 와 진짜 이사 가야겠다 인정했다니까요. 거기에 비하면 이번 집은 천국이에요, 천국, …….”


정수는 끊임없이 지껄였다.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정수를 지켜보며 애써 눌러온 의문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정수와는 웃으며 이야기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과 다름없이 말을 건네는 걸까. 혼자 술 마시는 건 싫어했는데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걸까. 혹시라도 후회하는 걸까. 조금이라도 날 생각하는 걸까. 아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정수를 통한다면 볼 수 있을까. 마주하게 된다면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나만 헤매고 있다는 말은, 예전이랑 똑같다는 말은……, 생각을 놓치고 말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낮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