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어긋남
3. 진짜 문제는 술에 취했을 때가 아니라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였다. 눈을 뜨면 간밤의 여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거라곤 지독한 두통과 울렁거림 뒤이어 따라오는 구역질이었다.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한 그 과정도 지나고 나면 주체할 수 없는 시간만 남아 있었다. 학교 주변을 맴돌아봤자 휴학생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가 탈진 직전의 몸을 누이는 수밖에. 그다음엔 숙취에 찌든 몰골을 수습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기를 하다가 가족 모두가 잠들고 나면 또다시 술자리를 찾아 집을 나섰다.
술에 취하기 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집에서 나오는 길도 맨 정신으로 감당해야만 했지만 그 순간들이야말로 맨 정신으로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버스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사람들이나 지하철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 앞자리를 다투는 사람들 속에 내 자리 같은 건 없었다. 정류장에 서 있으면 언제나 추웠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 서 있어도 혼자 서 있는 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웅크린 어깨 위로 바람이 몰아칠 때면 추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파고들어 마음속까지도 스산하게 만들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학교 앞에 도착하기만 하면 속으로 되뇌어가며 정류장의 추위를 참아내고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참아냈다. 학교 앞에 도착해서는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술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뇌어가며 거리를 서성이는 스스로를 달랬지만 마침내 취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럭저럭 버텨내는 것도 불가능한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먹자골목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질 않는 지혁 오빠를 기다리느라 지혁 오빠네 자취방이 있는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목을 빼고 있었다.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놓칠세라 찬찬히 훑어 올라가는데 끄트머리에 그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나는 지난번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찌 보면 지금껏 마주치지 않았다는 게 외려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 주변은 먹자골목을 포함해도 손바닥만 한 좁은 동네라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도 모이는 곳도 뻔했으니까.
그는 날 모른 척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다가 눈이 마주쳤지만 못 본 척 고개를 틀었다. 이어서 걸어오던 방향을 바꿔 근처에 있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무표정하게 굳어버리는 얼굴 하나만으로도 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엔 충분했다. 나를 훔쳐보다가 들킨 스토커쯤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친구로 돌아가기는커녕 남남으로 스치기조차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우리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를 발견하기 전에 그가 날 피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다시 실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가 놓아버린 관계를 붙잡고 있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나는 옆에 서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낯선 사람보다도 먼 존재였다. 무심함을 가장한 냉대에 나 역시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다.
내 눈이 끝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그를 좇았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의 뒷모습을 따르고 있었다. 어깨를 툭 치는 손에 놀라 고개를 돌리고 나서도 지혁 오빠와 함께 먹자골목으로 발을 옮기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내 머리에 반하는 내 몸의 의지였다. 내 마음에 반하는 또 하나의 내 마음이었다. 그에게 달려가고픈, 애원하고픈, 울부짖고픈, 욕설을 내뱉고픈, 또 다른 마음, 마음, 마음들. 내 마음이 수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다음날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와 설핏 잠이 들어서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그와 마주쳤다. 그가 모른 척 지나치던 순간을 꿈에서라도 되돌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그가 나타났고 나는 어김없이 모른 척하는 그를 얼어붙어 보고 있었다.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고 붙잡으려 해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꿈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돌아서는 그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는 그를 지켜보는데 지나온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려 회귀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발 아래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텅 빈 길 한복판에서 다시는 이렇게 보지 말자고 뇌까리며 돌아서고 있었다. 잘 가라는 인사를 던지고 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묻히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순간들을 한꺼번에 겪고 있었다. 발버둥 치며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순간들이 되풀이될까 두려워 다시 잠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