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단절

8장. 어긋남

by 문성 Moon song Kim

2. 택시를 타고 무작정 학교 앞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미정이에게 전화를 걸어 술집이름을 대고 얼른 나오라는 말만 남기고 끊어버렸다. 미정이를 앞에 두고 신나게 술을 들이붓다가 다음날 미정이 빈 방에서 부스스 일어나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앞에서는 막 도서관에 다녀온 척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까지 챙겨 먹고 방으로 들어가 숨 죽여 시간을 보냈다. 모두들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다시 집에서 나와 학교 앞으로 향했다.


악착같이 술자리에 매달렸다. 미정이 다음에는 지혁 오빠 다음에는 핸드폰 전화번호 목록 순서대로 전화를 걸어 생떼를 쓰다시피 사람들을 불러냈다. 가까운 사람이든 먼 사람이든 전화번호 목록에만 있을 뿐 연락은 해본 적 없는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한 명이라도 같이 술 마실 사람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또 다른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해도 꾸역꾸역 찾아가서 끼어들었다. 연일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의 하루는 매일같이 숙취에 시달리며 시작해서 만취로 끝나고 등장인물과 장소만 바뀌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는 버릇이 생겼다. 다음날에야 정신이 들어 적당히 마시고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술이 입에 닿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술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계속해서 “한 잔 더”를 외쳐대다가 어느 틈엔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 네 번, 매번 술을 마실 때마다 반복이 되자 버릇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취한 적은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적은 없었다. 다음날 술김에 저지른 일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긴 했어도 기억이 나지 않아 곤혹스러워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나면 어느 순간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핸드폰에 남은 통화목록과 메시지 따위 어제의 흔적을 붙들고 기억해내려고 기를 써 봐도 어느 한순간까지가 전부였다. 그 순간부터 다음날 눈을 뜰 때까지는 그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통째로 잘라내고 다시 이어 붙이기라도 한 것 같은 완벽한 단절이었다.


기억을 더듬다가 알게 된 거라곤 기억을 잃는 순간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흥에 겨워 술자리를 즐기다가도 그가 떠오르는 순간이 오고 이내 기억을 놓치고 말았다. 누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 대해 묻기도 했고 누군가 일부러 나를 배려하느라 그의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모두가 함께 했던 순간을 이야기해서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가 떠올랐다. 다른 이들끼리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그를 떠올리게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이니 과제니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야기는 끝끝내 머릿속 깊숙이 박혀 있는 기억을 건드리고 기억 속 어느 한 장면에 있는 그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일단 그가 떠오르면 머리는 과부하가 걸린 컴퓨터처럼 그대로 다운되어버렸다. 생생하던 모든 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잠에서 깰 때마다 낯설었다. 내 방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방에서 눈뜨는 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대개는 미정이 방이었지만 간혹 지혁 오빠 방이나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선후배 누군가의 방에 누워있을 때도 있었다. 누구 방이든 흠칫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살피고 반사적으로 전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아무리 더듬어 봐도 기억은 나질 않고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당혹스럽고 당혹스럽다 못해 두려워졌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내가 지나온 시간 속의 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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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전해주었다. 어느 날은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가 하면 어느 날은 느닷없이 화를 내며 소리치고 어느 날은 말없이 우울하게 앉아서 술만 마시다가 고꾸라졌다고 했다. 아무나 붙잡고 엉엉 울고 가야 한다는 사람을 놔주지 않고 매달리고 부득부득 집까지 따라가기도 했다고 했다. 사람들 이야기 속의 나는 그와의 일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감정만은 솔직하게 내보이는 사람이었다.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라 해도 그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는 맨 정신의 나보다 나았다.


밤이 오면 어김없이 뛰쳐나가 술에 절어 지내고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리는 걸 넘어서 정신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두려울수록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의 내가 간절했다. 차라리 그 시간 속에 그대로 멈춰 있고 싶었다. 내 안에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가는 두려움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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