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밀리듯 앞으로

14장. 어둠에 잠긴 풍경

by 문성 Moon song Kim

1. 그날 우리는 만취해서 헤어졌다. 비틀거리며 술집에서 나오다가도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다가도 서로를 가리키며 킥킥댔다.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서도 서로의 푸석한 몰골을 마주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로도 미정이는 나와 마주치면 어김없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쩌다 못 보고 지나치기라도 하면 달려와 나를 붙잡고 수다를 떨었다. 밥은 먹었는지 수업은 들었는지 어디에 가는 길이었는지 꼬치꼬치 묻고는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미정이 이야기 속에는 종종 그가 끼어 있었다. 그와 같이 저녁을 먹고 대학원 세미나에 들어가고 다른 예비 대학원생들하고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도 했다. 그가 먼저 연락해서 밥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았다고도 했다. 군대 문제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지혁 오빠와 함께 장교시험을 치기로 했다는 것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장교 월급을 모아 대학원 생활을 준비하려 한다는 사정이 있다는 것도 미정이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굳이 물어가며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정이는 부러 그와 있었던 일을 알려주려 했다. 왜 그를 만났는지 언제 어디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 세세히 설명해주려고 했다. 같이 대학원에 들어간 동기이자 친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애를 썼다.


미정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신경을 쓰게 되고야 마는 내가 한심했다. 그의 이야기를 낱낱이 듣고 있는 게 싫다가도 이야기가 끝날라치면 남은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씁쓸해졌다. 미정이가 그와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우스워졌다. 그와 있었던 일이라고 해봤자 미정이에게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에 불과하다는 걸 납득하게 되면 될수록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내가 싫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물었다. “걔가 그렇지” 당연하다는 듯 추임새를 넣어가며 맞장구치기도 하고 미정이가 그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오늘도 인우 얘기해주려고 그러지” 선수를 치기도 했다. “나한테 자기 이야기하는 거 알면 너한테도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거 아냐”하고 미정이가 당황할 정도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피하지 않았다. 헤어지기 이전의 일마저 이야깃거리 삼아 제삼자의 연애를 떠들듯 이랬었지 저랬었지 시시덕거렸다. 다만 내가 이야기한 것 이상을 캐묻거나 다 알고 있다는 듯 넘겨짚어가며 아는 체하는 이들에게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상대방이 아무리 집요하게 되물어도, 답하지 않는 나에게 기분이 상해 얼굴이 굳어도, 그래서 침묵이 내려앉고 마는 불편한 순간이 와도, 개의치 않았다. 가벼운 이야깃거리 수준만큼 딱 그만큼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기말이 닥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도 줄어들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시험과 발표 그리고 과제에 매달리느라 사람들과 마주할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점심 저녁을 같이 먹어도 시험이나 과제 이야기나 하다 헤어지고 강의실을 오가다 마주쳐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바삐 손을 흔들며 지나쳤다. 그렇게 이삼 주가 지나고 종강을 맞이하자 이제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학교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정이는 종강에 맞춰 해외로 긴 여행을 떠나고 지혁 오빠는 장교시험에 붙어 지방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그와 함께. 기말 중에 입대일이 잡혀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입대했다는 사실을 종강하고 나서야 전해 들었다. 다른 이들도 대학원에 가고 취업을 해서 학교를 떠났다. 또 다른 이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어학연수를 하러, 인턴십을 하러, 속속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나 하나만 준비 없이 겨울방학을 맞고 있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진로를 결정하고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무얼 선택하느냐에 따라 마지막 학년도 졸업 이후의 삶도 결국은 모든 게 달라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가는 것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길 바라셨다. 오래전부터 취업이 아니라면 그나마 용인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교나 연구원 같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까지라고 공언하고 계셨다. 진작 진로를 결정해 준비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할 여유는커녕 어서 빨리 결정하고 준비를 서둘러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선택해야 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대학원에 가서 계속 그와 마주치느니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선택의 기준이 될 만한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꼭 하고 싶은 것도 꼭 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앞으로의 삶을 좌지우지할 중대한 문제라고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미 하루하루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에 불과했다. 원한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과 원하지 않는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르는 것도 그렇게 맞닥뜨려온 일상적인 선택의 순간들처럼 정해진 기한 안에 정해진 선택지에서 골라야 하는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점심시간 안에 식당을 고르고 그곳의 메뉴 안에서 하나 골라야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새 학기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졸업반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혼자였다. 두 학기나 휴학을 한 탓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누군가와 어울릴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려웠다. 학점을 올리려고 재수강을 신청하고 졸업 규정까지 맞추려다 보니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빡빡했다. 학기 초부터 과제와 시험을 챙기는 한편 토익과 컴퓨터 자격증을 준비하고 틈틈이 취업설명회나 공개채용설명회를 찾아다니느라 주말에도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학기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내내 바쁘게 지내야 한다는 걸 겪어보지 않고도 짐작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에는 인턴십을 하고 가을학기에는 입사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틈틈이 졸업논문을 쓰겠다는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걸 다 지킨다 해도 취업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디든 합격해서 취업을 할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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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밀리듯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하고 앞으로만 내딛고 있었다. 매일같이 해야 할 일들로 다이어리를 가득 채우고 마무리할 때마다 하나씩 지워가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할 일이 많다고 해서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그날 할 일을 빨리 끝냈다고 해서 즐겁지도 않았다. 발표나 과제에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발견했다고 애가 타지도 않았고 시험을 잘 쳤다고 기쁘지도 않았다.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도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었다. 무엇에도 무덤덤했다. 감정을 거세당한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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