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간에 처음으로 채운 물건들: 책과 서류들

의식"주"일상실험

by 문성 moon song

장판과 욕실을 마무리할 시점에 공예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추진해서는 진행하기 어려운 전시들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지원했지만 청년예술청에서 시작했던 일도 점점 바빠지고 있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저녁에는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계속하게 된다면, 인테리어도 이사도 주말에만 가능할 텐데. 일을 두배로 하게 되면 그만큼 쉬어야하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모든 걸 마무리하려면 매일 조금씩 인테리어와 이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내 급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날씨는 늘 흐렸고 인테리어 자재도 가구도 주문을 해도 코로나로 인한, 날씨로 인한 배송지연으로 이어졌다. 답답한 마음을 몰라주는 어긋나는 일정들을 야속해하는 것도 잠시. 나는 스케줄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무리를 하고 사람들을 서운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병이 나 응급실에 가야했다. 엄마의 치매증상이 악화되는 와중에 아빠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컨디션이 나빠지셔 응급실행. 그리고 일주일쯤 되었을까 대기를 신청하고 기다리던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의 입원의사를 묻는 전화에 이번에 거절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은 모두 동의했다. 그렇게 여러가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왔고 내 머릿속에서도 인테리어도 이사도 뒤로 밀리고 있었다.

전쟁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문득 왜 이리 조바심을 내고 있나,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닌데, 나 자신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문성, 조금씩 꾸준히 가보자.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천천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아이같은 나에게 자문자답한다. 무엇이 제일 마음을 누르고 있나. 이삿짐. 어째서. 모두 옮기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만 옮기고 내 생활에 맞게 재정리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생활방식 자체를 더 낫게 새롭게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를 몰라서.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꼭 필요한 것들부터 갖추고 생활해나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추가해보자. 지금 꼭 필요한 것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들이 뭐지. 나에겐 책과 서류들이었다. 최근까지 진행해온 내 일들, 지난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던 내 삶의 궤적,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들을 담고 있는 책과 서류들. 한꺼번에 옮기는 게 불가능한 가장 무거운 짐이라 옮기는 것 자체도 나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당장 출근과 야간프로젝트에 정신없는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가 없는 것들, 그래서 당장 잠자리에 지장이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나는 보르헤스가 눈이 멀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 머릿속의 작은 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내 책들과 서류들을 나만의 서지항목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나의 10대, 20대, 30대를 함께해온 기록들, 일기장과 편지들, 앨범과 사진들, 내게 이정표와도 같았고 지금도 여전히 이정표가 되는 책들, 그리고 더는 필요없는 책들, 내가 몸담았던 분야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지금도 들여다보며 공부해야하는 책들과 서류들, 그리고 아직 갈무리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며 기록하고 정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자료들. 그것들을 주말에는 한 항목씩, 주중에는 집에서 나설 때마다 집에 돌아올때마다 들 수있는 만큼 들어서 옮겼다.

공간박스는 저렴하기도 하지만 쉽게 옮길 수 있고 쉽게 새로운 형태로 묶을 수 있기에 늘 애용했고 이번에도 근사한 책장을 새로 사기보다는 최대한 이용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간박스는 a4사이즈를 꽂기에 약간 작았고, 공간박스만 올리기에도 책장으로 만들기엔 갯수가 부족했다. 이전에 diy 간이침대보드로 쓰던 합판을 공간박스의 깊이에 맞춰 잘라 공간박스를 사이사이에 깔고 그 위에 합판을 얹는 방식으로 얹기로 마음먹었다. 책과 서류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한 줄에 공간박스를 서너게 정도 두고 그위에 0.5미리 정도의 합판을 얹고 다시 엇갈리는 위치에 공간박스를 얹는 방식으로 한쪽 벽면을 채워나갔다.

매일 조금씩 옮겨온 책과 서류들을 다시 한번 자문하며 정리해나갔다. 디지털화한 것이라면, 다시 보지 않을 거라면, 재활용하는 게 낫다면, 페휴지로 혹은 나눔으로 처분하며 가까스로 한쪽벽면 안에 정리하고 앞으로 나올 자료를 정리할 수 있도록 여분의 공간을 만들려 애를 썼다.

문구류와 디지털기기와 관련된 잡사니는 서랍에, 미술용품과 음악관련 물품들, 컴퓨터관련용품들, 구독하고 있는 잡지는 아무래도 따로 분류해두는 게 좋겠다 싶어 거실에 수납장을 마련해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테이블과 의자를 늘 비워두고 언제든 작업을 혹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카페의 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나를 위해서. 카페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그런 공간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공간을 차지하기보단 공간에 자유롭게 배치해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면 했기에 뒤지고 뒤지다 이케아의 테이블과 이동가능한 바퀴달린 서랍장, 계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스툴, 쌓아서 부피를 줄일 수 있는 스툴을 구입했다. 애써 매끈하게 다듬어놓은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어색하고 낯설었다. 공간은 결국 사람이 채우는 것이 어떻게 생활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며 매번 물어야하는 일이었다. 너는 이 공간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 이 물건과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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