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일상실험
1.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힘겨운 한 달 끝에, 나는 지푸라기를 움켜쥐듯 사소한 일과를 그러쥐려고 애썼다. 하루하루를 채우는 의식주, 그 중에서도 끼니에. 우선은 모아두었던 요리 사진들을 업로드하고 다시 요리를 시작하려고 하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내가 찍어둔 사진들, 분명 내가 만든 요리들인데 낯설었다. 몇 달의 고생끝에 만든 내 공간조차. 이 공간에서 자고 일어나 씻고 입고 먹는 방식을 실험하던 순간들을 모조리 까먹은 듯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마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식재료를 확인했다. 어떤 게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유통기한은 어떻게 되는지, 무엇부터 먹어야하는지. 그것들로 요리를 하기 위해서 또 필요한 것들이 있는지. 최대한 있는 것들을 활용해나가는 방법을 적어내려가다가 다시금 멈칫했다. 분명 나는 최소의 비용을 쓰려고 아등바등하겠지.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너를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라고 했겠지. 나는 다른 사람 위하듯, 나를 위한 원칙을 세워보기로 했다.
1. 세 끼를 챙겨 먹을 것.
2. 되도록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3. 최대한 건강한 재료로 직접 만들거나,
4. 즐겁게 음미할 수 있는 음식으로 사먹을 것.
원칙을 세우고 나니, 적어도 최소한의 비용을 쓰겠다고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지는 않으리라는 다짐같이 여겨졌다. 필요한 것들을 다시금 적어내려갔다. 그렇게 장을 보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과 함께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며 또 몇 주가 지났다.
2.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나의 세 끼 루틴이 생겼다.
아침은 가볍게 오트밀과 과일 그리고 요거트나 우유 혹은 두유. 동남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독일친구가 알려준 아침식사였는데 이따금 생각나곤 했다. 아침을 차려먹는 게 부담스럽고 과일을 따로 챙겨먹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나를 위해서 지키고 싶었고 문득 이 메뉴가 생각났다. 검색해보니 오트밀의 가격은 괜찮았지만 과일은 비싸기도 하고 상하기도 쉬워 부담스러웠는데 냉동과일이 오히려 영양소파괴도 덜하고 보관도 용이하겠다 싶어 주문해서 시도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전날 밤에 오트밀 세스푼에 냉동과일과 바나나를 살짝 재워두고 아침에 부드럽게 불은 오트밀에 요거트를 부어 간단히 먹는다. 찝을 수록 고소한 내가 좋아하는 맛. 가볍지만 빵 한쪽이나 바나나 하나보다는 포만감이 오래간다. 앞으로 다양한 과일. 견과류. 시나몬. 콩포트, 잼 등 시도해볼 생각.
점심은 되도록 도시락을 싸려고 노력중이다. 밀프렙(meal prep)을 어디선가 읽고 적어두었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보는 중. 역시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일요일저녁에 밥을 넉넉하게 지어 주중 사무실에서 먹을 점심 횟수만큼 밥을 담고, 그에 맞게 반찬을 싼다. 처음이라 지금은 되도록 냉장고에 있는 것들과 밑반찬 위주로 싸는 중. 고기가 있어야 오후를 버틸 수 있고 균형과 식감을 위해서도 야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메뉴를 바꿔보는 중.
저녁은 되도록 퇴근 후 집에서 먹으려고 노력중이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 - 누군가 선물로 주거나 덤으로 얻었거나 배달을 시키고 남은 것들-을 그대로 두면 무한정 냉장고에 있겠구나 문득 깨닫고는 하나씩 골라 요리로 만들어보는 중이다. 친구가 자신은 안먹는다며 받은 선물을 그대로 넘겨준 국내산 멸치는 견과류와 함께 볶아 저녁 밑반찬과 점심도시락 밑반찬으로. 달걀은 야채와 함께 스크램블로. 밥 반찬으로 혹은 토스트와 함께 브런치로. 역시 매일 조금씩 메뉴를 바꾸어가는 실험 중.
그 와중에 새삼 알게 된 것들: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보는 걸 좋아한다.
요리과정을 나에게 맞게 변형해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요리에 오랜 시간을 쏟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반찬이 많은 것보다는 오히려 적은 게 좋다. 대신 맛이 균형잡힌 걸 좋아한다.
예를 들면, 쌀밥에 반찬 서너 개 보다는 덮밥같은 한그릇 음식에 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있다거나.
밥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파스타나 떡볶이같은 게 의외로 요리에 시간이 덜 걸리고 먹기도 편하다.
그래서, 조금씩 레시피를 바꿔가며 파스타와 떡볶이를 몇 번이나 해보았고 아마 앞으로도 하게 될 듯 하다. 마늘을 듬뿍 넣은 오일파스타, 마늘과 새송이버섯, 청양고추를 듬뿍 넣은 오일파스타. 다음 번엔 토마토 파스타? 떡볶이는, 고추장떡볶이, 국물떡볶이, 치즈떡볶이, 다음 번엔, 짜장떡볶이? 쓸데없이 새로운 메뉴를 고르는 일에 진지해진다. 이렇게 사소하고도 하찮은 일에 몰두하는 순간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한 주가 되고 일 년이 되겠지, 매 번의 세 끼를 더욱 행복하게 채우고 싶다고, 쓸데없이 한 번 더 진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