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일상실험
1. 겨울옷동굴
11월 어느 날 갑작스레 뚝 떨어진 기온과 함께 갑작스레 겨울이 시작됐다. 가을옷을 정리하고 겨울옷을 꺼낼 시간이었다. 부담스러웠다. 지난겨울 미니드레스룸이 내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겨울옷은 특히 외투도 많고 부피도 커서 입구까지 공간을 다 잡아먹고 그늘을 짙게 만들어 미니드레스룸을 비좁은 동굴처럼 만들었다. 아침마다 그걸 보며 옷을 고르는 것도 옷더미 속으로 낑낑대며 들어가 옷을 찾아 입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 순간들이 연이어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여름옷을 정리하고 가을옷을 꺼내며 이미 생각한 문제였다. 봄여름가을까지는 옷을 다 걸어두는 것도 꺼내 입고 벗어두는 것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겨울옷들을 다 걸어두기에는 분명 비좁은 공간이었다. 공간을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쩐다 고민하다가 일단은 부딪혀보기로 했다. 옷 정리를 하고 공간을 정돈하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2. 정리를 시작하다
겨울에 이어서 입기 어려운 가을 외투와 얇은 상의와 하의들을 행거에서 내리고 겨울옷을 전부 꺼냈다. 평상형 침대 안의 큰 공간에 보관해두었던 한겨울용 상의와 하의들, 그리고 겨울 외투들. 본가 옷장에 보관해두었던 겨울 외투들까지 모두 가져와 침대 위에 쌓아보았다. 그렇다. 난 겨울옷들의 분량과 부피를 감당하지 못해서 부모님 댁에 비어있는 옷장을 활용하는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썼다. 초겨울 외투들만 내려두었다가 한겨울 외투들과 자리를 바꾸는 방식으로 공간과 옷 모두 포기하지 않고 감당하려 애썼다. 그러나 옷을 나누어 보관하는 건 번거롭고 옷을 활용하는 데에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이었기에 우선은 옷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볼 생각이었다.
3. 공간이 모자란 분량
옷더미는 순식간에 침대 위에 산처럼 쌓였다. 옷걸이도 상자 한 박스에 가깝게 쌓였다. 시작할 즈음 가벼운 마음으로 찍어둔 사진과 비교할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그 양과 부피에 질려서 정리부터 하지 않으면 이대로 밤을 꼬박 넘길 수도 있겠다 싶어 초조했다. 나는 그날 쉬지 않고 하루 종일 겨울옷을 분류하고 정리했다.
미니드레스룸의 기억자 행거의 왼쪽 상단에는 겨울 외투를 하단에는 정장 바지와 치마와 반바지, 그 아래의 공간박스에는 청바지와 면바지들, 오른쪽 상단에는 원피스 그리고 아래에는 블라우스와 셔츠, 면티셔츠와 스웨트 셔츠, 니트류와 카디건과 같은 상의들. 그리고도 침대 아래 수납함 두 군데 문을 열자마자 꺼낼 수 있는 앞쪽에 두꺼운 니트류를 그리고 오리털 점퍼와 퍼를 정리했다.
그런데도 공간이 모자랐다. 겨울 외투들은 지난겨울처럼 입구부터 꽉 차서 내가 들어설 자리는커녕 시선도 막고 있었다. 심지어 모자와 장갑, 목도리들을 둘 곳도 없었다. 겹쳐서 쌓아놓는다면 꺼낼 때마다 번거로울 것도 분명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서 꺼내 둔 한 두 개만 계속해서 쓰게 되거나 잊어버릴 게 뻔했다.
4. 옷 욕심을 깨닫다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옷이 많아졌을까. 찬찬히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웃기는 건 올해 나는 거의 옷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가지고 있는 옷을 쉽사리 버리지 않으니 지금까지 모아 온 옷들만으로도 상당한 분량이 되었는데 언니들이 옷을 정리하며 주었던 것들, 엄마의 유품에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것들까지 더해져 이 지경까지 온 것이었다. 소재도 마감도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것들만 그리고 활용할 수 있는 것들만 갖고 있다고 여겼는데 겨울 코트만 열 벌이 넘는 걸 확인하고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이것들을 잘 활용하고 있을까. 옷을 좋아하고 옷으로 표현하는 재미를 즐기지만 매일 다른 코트를 입고 제대로 소화해내고는 있었던 걸까. 지난겨울 아침마다 저기 저 동굴처럼 보이는 옷더미를 볼 때마다 답답해하면서 앞쪽에 있는 옷들만 입지 않았던가.
옷을 사지 않고 있는 옷들을 활용하는 걸 즐기는 나 자신을 꽤나 소박하고 알뜰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당한 옷 욕심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욕심 때문에 오히려 있는 옷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도.
5. 공간확보하기, 그러나
첫 번째로 찾아본 해결책은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미니드레스룸과 수납장은 이미 꽉 찼으니 현관 앞에 임시 겨울 외투와 겨울 액세서리 수납공간을 만들어두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겨울 외투도 액세서리도 외출할 때 필요한 것들이니 나설 때도 돌아와서도 그곳에 수납해두고 또 누군가 온다면 손님용 외투와 액세서리 보관도 함께 해둘 수 있지 않을까. 외국에서도 그렇게 현관 앞 수납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나 작은 집 현관 앞 인테리어를 검색해 좁은 현관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우리 집의 현관이 안 그래도 너무 작고 좁아서 행거든 수납함이든 최소한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어야 했다. 겨울이 지나면 쉽게 접어서 넣어 보관할 수 있는 수납함을 고르고 행거도 최대한 심플하고 키가 작은 것으로 고르고 골랐지만, 실제로 조립해 현관 앞에 배치해보자마자 깨달았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두면 공간은 더욱 좁아져 둘 다 제대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결국은 액세서리용 수납함만 두고 행거는 여기저기 옮겨서 배치해보았다가 결국은 나보다 필요한 친구에게 보내주었다. 액세서리는 해결했지만 여전히 겨울옷 특히 부담스러운 겨울 외투 옷더미는 남은 채였다.
6. 해답은 옷줄이기!
두 번째 해결책은? 공간을 만들 수 없으니 있는 옷을 줄이는 수밖에. 갖고 있던 옷들을 최대한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나? 적어도 내가 낑낑대지 않고 편안히 미니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옷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는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 더 줄여서 한눈에 가진 옷들을 볼 수 있고 그중에 무엇을 고르든 기분 좋게 입고 또 멋지게 매치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옷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날마다 즐겁게 옷을 고르고 또 그 옷을 입고 나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어, 그런데 이거 최소한의 옷으로 생활하는 미니멀리스트들이 하던 이야기 아니었던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옷을 좋아하는 나하고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블로거, 유튜버, 글쓴이들이 떠올랐다.
흠. 옷을 좋아해도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미니멀리스트임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블로거의 웹페이지, 유튜버의 영상, 글쓴이의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그렇게 겨울옷더미는 미니멀리즘을 시작하게 만들었다.